우리는 평가의 수단을 가지고 있는가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믿을 만한 소개로 찾아간 그 의사 선생님은, 의학을 잘 모르는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그림도 그려 주시고 비유도 적절히 사용하여 친절하게 제 증상을 설명해 주셨고, 이럴 경우 가능한 치료법들을 열거해 주셨으며, 그 중에서 자신이 권하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추천도 해 주셨습니다. 아무튼 저에게는 만족스러운 병원 방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병원과 의사 선생님에 대해서 만족하는 이 근거들은 적절한 것일까요?

물론 친절은 환자의 기분을 좋게 하고, 적절한 수단을 사용한 눈높이 맞춤 설명은 환자를 안심시킬 수 있겠지만, 사실 의사의 진단이 정확한지와 그가 제시하는 치료 방법이 적절한 것인지는 의학과 의료에 정통하지 못한 환자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 부분이 의사의 친절함과 언변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이 여러 webpage들과 입소문들을 통해서 소위 “의료 서비스”를 평가하는 데에 사용하는 기준은 친절함과 깔끔한 설명,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가 다 나았는가 등입니다. 이 중에서 마지막 부분은, 사실 그 의료진만이 원인인지 여부를 분명히 할 수 없을 만큼 confounding factors가 많음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의료 서비스를 평가할 제대로 된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도, 내가 가진 기준에만 근거해서 결론에 이르고 있으며, 더 심각하게는, 그러한 결론 도출과정의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경각심 마저 잃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료 분야 뿐만이겠습니까.

대부분의 대학에서 학생들은 학기말에 자신이 수강한 수업과 교수에 대한 평가를 합니다. 평가 항목들 중에서는 학생들이 판단할 수 있을 만한 항목들도 많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이 교수는 수업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진행했나요?” 같은 질문에 답을 할 때에, 학생들은 과연 그에 걸맞는 평가의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강의 평가 점수는, 한 학기동안 교수가 학생들에게 얼마나 진심으로 대했으며 친절했는가와 얼마나 깔끔하게 설명을 잘 했는가에 주로 근거합니다. (물론 성적을 얼만큼 잘 주느냐도요.)

정치도 그렇습니다. 정치인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인격적이고 진실한지 따위에 근거해서 총리,국회의원, 장관, 대통령을 평하는 유권자의 선택과 여론은 과연 적절한 평가 기준에 근거한 것일까요? 저에게는 이러한 기준들만으로 하는 평가들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말이지요.

적절하고 충분한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소비자와 유권자들은 판매자와 권력자를 평가할 권리와 때로는 책임을 지닙니다. 의학을 모른다고 해서 자신이 받는 의료 서비스에 대한 평가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며, 학생들의 강의 평가는 결국 단점보다 장점이 크게 작용하니까요. 다만, 적절한 평가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경우,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며 자신의 어설픈 판단을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평가의 기준이 충분하거나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각과 인식 정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요즘 한창 이슈들이 많은 한국과 미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자신감 넘치는 평론들이 피로감을 주는 이유는, 그 주장들의 강경함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각과 인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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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시사하는 바

한국 국회의원 김무성이 공항에서 자신의 carry-on luggage를 수행원에게 전달하면서, 그 수행원 쪽으로 시선을 향하지 않은 채 밀어서 전달한 모습이 “no look pass”라는 조롱과 풍자로 이야기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일이 화제가 된 이후에 김무성과 인터뷰하는 기자가 그 일에 대해서 묻자, 수행원이 보이길래 밀어줬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되묻는 모습이 알려지기도 했지요. 그의 이 인터뷰를 곱씹어 봅니다. 그러게요, 뭐가 잘못일까요?

제가 대학교때 잠깐 몸담았던 모임에서는 4학년이 1학년을 부를 때 무성음으로 “춧춧”이라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면 1학년은 벌떡 일어나서 “예”라고 대답하며 그 4학년에게 가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지요. 운동부들과 가까운 모임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여러 가지 규율이 많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어서 3학년 선배 한명에게 “그냥 야! 라고 부르시는 게 더 편하실 것 같은데, 꼭 그렇게 강아지 부르듯이 불러야 하나요?”라고 되물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하고 말대꾸한다며 혼만 났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저는 그 모임을 나왔는데, 1학년을 부르는 호칭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 호칭이 시사하는 여러 가지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이유가 컸습니다.

제가 박사과정때 교수와 그의 오피스에서 미팅을 하던 중에, 다른 교수 한 명이 잠깐 미팅을 하자며 그를 찾아왔습니다. 제 방에 돌아가서 언제가 될지 그 미팅의 재개를 기다리던 중, 그 교수에게 메일이 한 통 왔습니다. 제목도 없고 내용도 없는 blank mail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실수로 클릭했는지 교수에게 확인하려다가 말았는데, 30분쯤 후에 다시 메일이 왔습니다. You can come. 이라는 한 문장이었습니다. 다시 찾아간 교수 방에서 그는 저에게 아까 메일 보냈을 때 왜 오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Blank mail이어서 무시했다고 하자, 자기는 그 정도면 제가 알아들을 것으로 생각했다며 답답해 했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김무성만큼이나, 그 때 그 3학년 선배도, 제 지도교수도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러게요. 어떻게 생각하면 굴러오는 가방을 받는 일, “춧춧”이라는 호칭에 대답하는 것, 그리고 blank mail을 알아서 추측해서 그 방으로 달려가는 일 자체는 모욕감을 느끼는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수행원이 무릎을 꿇어야 했던 것도 아니고, 선배가 후배에게 욕을 한 것도 아니고, 그 교수가 저를 학대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사실 그 수행원은 평소에 무릎을 꿇어야 할 수도 있고, 그 모임의 선배들은 후배에게 쌍욕을 종종 했으며, 그 교수는 저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모욕적인 말을 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그 일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 장면이 시사하는 다른 장면들의 바탕색이 그리 밝게 상상되지 않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그 장면들이 수행원과 후배와 학생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는 항변은 일견 동의가 됩니다만, 그들에 대한 예의과 존중에서 그런 행동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를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더 높은 사람임을 표현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고 싶은 욕구는 우리 안에 깊게 내재하는 것 같습니다. 제 삶의 장면들 속에서 갑(甲)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 삶의 모습들을 돌아봐도, 제가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을(乙)로서의 기억들이 주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적어도 저는 제 삶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는 반성과 자람으로 귀결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만큼이나 두려운 길입니다.

 

Alpha and Omega

오웬이의 데이케어 마지막 날입니다. 그 동안 오웬이를 맡아 주셨던 선생님들 한분 한분을 따로 만나서 인사를 나눴습니다. “아이가 처음에 많이 울고 영어도 불어도 한 마디 못할 때 맡아 주셔서 특별히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에 오웬이의 데이케어 첫 선생님이셨던 분은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습니다. 삶의 궤적이 맞닿고 떨어지고 하는 무수한 반복 속에서도 그렇게 무뎌지지 않고 아쉬움을 표현해 주시는 그 분의 모습이 저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고마운 분들의 마음만큼 오웬이가 자라 주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의 사랑에 자식이 오롯이 반응하기를 기대하는 것 만큼이나 허황된 것일 테고요, 그저 머금은 사랑의 자양분으로 촉촉하게 자신만의 잎싸귀를 틔워내기를 응원합니다.

사진은 오웬이의 데이케어 첫 날과 마지막 날 등교 모습입니다.

Daycare first and last

자기 변호 본능을 거스르려는 노력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어서 참 좋겠다.” 중학교 2학년때 저의 가까운 친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왔지만, 그런 표현으로 들으니 다른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나만큼 말이나 글로 정리하지 못하는 걸까? (너무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 말을 들었던 열네살때까지는 그냥 제가 똑똑해서 말을 잘 한다고 착각했더랬습니다.) 나도 내 말과 글에 아쉬움과 답답함이 많은데, 그건 표현의 모자람보다는 생각의 불충분함일까? 지금보다 내 생각을 더 잘 표현하게 되면 나는 더 행복해질까?

삼십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가끔씩 되새기게 되는 고민의 시작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영주권과 관련해서 제 변호사와 있었던 일은 사람의 능력과 자기 방어 우선 본능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민을 저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법을 더 잘 알게 될 수록, 자기 스스로의 행동의 적법성/위법성 여부를 본능적으로 먼저 떠올려서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제 변호사는 미숙해서 그것을 저에게 방어적이고 명시적으로 표현했을 뿐, 누구나 마음 속으로는 그러한 자기 방어를 우선하는 것이 본능일 지도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생각할 시간이 없을 만큼 급작스러운 자동차 정면충돌 상황에서 운전하는 사람의 뒷자리에 앉은 승객이 가장 위험하다는 통계 역시, 운전하는 사람이 뒷사람과 자신의 안전을 비교해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충돌로부터 자신의 몸을 피하려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지요.

그동안 억울했다며 어용 지식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유시민을 보며, 저는 정말로 저렇게 살지 않도록 힘써야겠다는 반성과 다짐을 합니다. 노무현 정부가 진보 언론 때문에 실패했다는 그의 진단은 존중하고 되짚어 볼 가치가 있겠습니다. 저는 그 진단에 동의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독단적인 진단에 이은 그의 선동적이 발언과 행태는, 과연 말을 잘 한다는 것이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제 고민을 더 깊게 합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지난 두 주 동안 유시민의 썰전은 유치하고 피곤한 말들로 가득했습니다. 새 정부의 정책과 관련된 논의에 대해서 문재인으로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최선이다라는 주장으로 그는 일관했고, 문재인 개인의 성품에 대한 찬사까지 곁들여서 다양한 관점에서 시사적 이슈를 바라본다는 프로그램의 취지를 무색하게 했습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깊은 사색과 열린 토론을 뒤로 한 채 자기 변호와 방어에만 힘을 쏟는 모습이 얼마나 추잡할 수 있는지 처절하고 안타깝게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억울했으니 – 물론 그것도 자신의 일방적인 결론에 근거해서 – 이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사용해서 나와 내 편에 대한 변호와 방어를 우선하는 것을 나의 소명으로 삼겠다는 그의 다짐은 얼마나 비루한지요. 꼭 그렇게 다짐하지 않아도, 개인이 가진 능력은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에 우선적으로 사용되는데 말이지요.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다짐은, 내가 가진 재능과 위치가 사용되는 방향이 내 본능을 거슬러서 나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과 어깨를 잇대는 일이 되도록 스스로를 다잡는 절실함이 아닐까요.

ceteris paribus

사회과학 연구의 많은 분야에서는, 어떤 사건의 영향력 또는 효과를 정확히 측정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 상황에서 실험을 하기가 어려운 데다가, 여러 가지 조건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하고, 측정 모델의 전제인 변수들의 독립성(independence)이나 외생성(exogeneity)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문제들을 완화하려는 노력은 사회과학 방법론의 중심축으로서 지금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분야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회사가 한 제품의 가격을 내릴 때 그 판매량이 얼만큼 늘어나는가를 측정한다고 해 봅시다. 경영/경제학의 경우 학부과정 통계 수업에서라면, 회귀분석(regression) 같은 간단한 통계모델을 통해 가격과 판매량 사이의 관계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부 4학년이나 대학원 과정에서 이 방법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선, 우리와 경쟁관계의 회사들이 서로 상대방의 움직임에 근거해서 자신의 가격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거시경제 시장이나 기후 변화도 소비자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게다가 우리 회사의 가격 결정은 회사 내부의 다른 결정들 (광고, 노동자 임금, 설비 투자 등등)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가격 자체만의 효과를 분리해 내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 정보들을 다 구해서 모델에 넣는다고 해서 정확한 측정 결과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가격과 매출 이 둘 사이의 관계만 놓고 보면, 대부분의 실제 데이터에서 둘 사이는 양의 상관 관계 (positive correlation)를 보입니다. 가격이 높을 수록 판매량이 높다는 것인데요, 이는 기업이 이미 판매량을 예상하고 난 후에 판매량이 높을 것 같은 제품의 가격을 높게 책정하기 때문입니다. 가격이라는 변수가 외생적(exogeneous)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통계 기법으로 해결한 후에 모델을 측정하면, 가격과 판매량 사이의 음의 관계 (negative correlation)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론이 정반대로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ceteris paribus, 즉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측정의 기본 전제를 성립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회과학에서는,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설명할 때에는, 어느 하나의 사건이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한국의 1970년대 경제발전이 과연 대통령의 개발정책으로 인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 명확한 답을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많은 상황에서 상황들을 단순화해서 비교하고 또 평가합니다. 한국의 교회들에 앉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의 1990년대에 목회와 기독학생 사역을 했던 사람들이, 지금의 사역자들에게 너희들이 우리때처럼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때만큼 되지 않는 거다, 우리 때에 그렇게 했더니 잘 됐었다, 너희들이 내 말 안듣고 변화랍시고 이렇게 했더니 결과가 안좋지 않느냐 등등의 지적은, 자신들이 일하던 시대의 부흥이 “다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고백과 직접 모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회과학적으로 경험적인 타당성을 갖추지 못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효과에 대한 평가를 다 무시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다음 두 가지의 경우의 평가에서는 ceteris paribus에 대한 기준을 높여서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 비교가 자기 자랑으로 사용되는 경우이고, 둘째는 그 평가를 다른 사람에 대한 지적과 비난으로 귀결시키는 경우입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대한 찬양이 단순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면,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기독교 사역의 예는 거기에 폭력이 더해진 경우입니다. 칠포세대(七抛世代)의 요즘 젊은이들에게, 내가 이렇게 해서 결혼했다든지 어떻게 열심히 공부해서 취업했다든지 하는 꼰대질 역시 무지와 악함의 결합입니다.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가격과 매출의 상관관계처럼, 전체 그림을 다 맞추고 나서 보면 그 결론이 정반대일 수도 있음을, 사회 현상을 이야기할 때에는 꼭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