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점, 하나

제가 그룹 성경공부를 할 때 “…해도 되냐?”라는 질문에 (언제나는 아니지만) 종종 하는 반문이 있습니다.

“저도 그 부분이 궁금하기는 해요. 물론 저도 답은 없구요. 그런데 저는 동시에 이런 궁금함도 생기더라구요. 된다/안된다가 무슨 뜻일까요? 된다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거나 말거나 별로 관심이 없으시다는 뜻일까요? 안된다는 것은 그렇게 하면 거기에 따른 처벌이 있다는 뜻일까요?”

복음이라는 삶의 거대한 길잡이 앞에서 무엇무엇을 해도 되나요 혹은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은 대체로 방향성 상실의 표현인 경우가 많습니다.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궁금함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반경이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하고 싶은 욕심이 아닐까요.

사회과학 대부분의 과목이 그렇듯이, 제 과목에도 학기말 페이퍼(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시험과 달리, 각자 주제와 연구방법을 정하는 항목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서 학생들이 저에게 질문을 많이 합니다. 따로 시간을 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래도 저로서는 정해진 지식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어떤 자료를 찾아봐야 하는지, 찾은 자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해당분야에 어떤 이론들이 있는지, 이 통계들은 어떤 모델을 이용해서 분석해야 하는지를 학생들이 물으면, 저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학생들의 질문을 듣고 답하는 시간은 대체로 즐겁지만, 저를 힘빠지게 하는 질문도 하나 있는데요, 바로 “이거이거를 꼭 해야 하나요? 안해도 되나요?”입니다.

성경공부의 경우에는 물론 그런 질문을 한 자체에 대해서 질책하거나 면박을 주면 절대 안되겠지요. 게다가 질문 자체를 막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없던 열정을 갖게 될리도 없겠구요. 다만, 본인이 그런 질문을 왜 갖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계기를 주려는 노력은 (적어도 때로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성경공부때만큼은 아니지만, 제 수업의 기말 프로젝트의 경우에도 그런 질문 자체에 면박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은 합니다. 물론 저의 그러한 노력은 아직도 많이 부족해서, 학생들에게 제 짜증이 전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의 이런 부족함을 가리기 위해 가끔은 웃으며 이렇게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 자료 찾아보면 어떤 내용이 있을지 저는 개인적으로 궁금하네요. 학생도 궁금하죠?” ^^

결국에 페이퍼를 읽어보며 채점을 해 보면, 그런 질문을 한 학생들은 그들이 질문한 그 부분을 했든 안했든 상관없이 페이퍼의 수준이 높지 않습니다. 본인이 이 주제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로 이 과제를 억지로 했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적어도 이 주제를 좋아하고 업으로 삼고 있는 저는 그 차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결론은 성경공부에 동일하게 적용하기는 많이 조심스럽네요.)

글쓴이가 억지로 쓴 글을 읽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인데, 바야흐로 학기말이 다가오니 이제 바로 그 일을 할 때가 왔습니다. 진하게 커피 한잔 마시고 채점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덧) 물론 되나 안되나 하는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하면 안됩니다. 위험하니까요. 그런데 요즘 이놈이 그 안되는 일들을 점점 더 많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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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쯤 만나는 사람들

저는 가을학기에는 대학원 수업을, 겨울학기에는 학부 수업을 합니다. 올해도 여느해처럼 제가 맡은 학부 수업은 1학년 마케팅 기초 과목인데요, 몇몇 사연이 있는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열아홉살입니다. (이 곳에서는 100% 고등학교 성적으로 대학을 진학하기 때문에 재수를 하는 학생이 없습니다.)

열아홉이라는 나이는 정말 어린 나이지요. 제 열아홉살을 돌아보면 이불킥을 그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게다가 대학의 두 번째 학기는 대학생활의 신기함과 열정올 잃어갈 때이고, 퀘벡 출신이 아닌 학생들은 어둡고 추운 겨울이 길어지면서 집도 그립고 우울증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독감이라도 한번 걸리면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차게 되지요. 대학에서 새로 사귄 연인과 헤어지는 일도 많은 시기이구요. 수업에서만 만나는 학생들의 속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일들만 나열해도 이들의 삶이 녹록치 않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출석을 점검하지 않는 제 수업에는 2월 중순쯤이 지나면 빈 자리가 크게 늘어납니다. 1학년이니만큼 수업을 안나오는 대신 신나게 놀러 다니기라도 한다면 다행이겠지만, 실제로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업을 안나오는 학생들 대부분은 그냥 무기력하고 우울해하면서 집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지난 주에는 수업에서 퀴즈를 봤습니다. 중간고사보다 문제를 쉽게 내지만 평균은 약 5%쯤 더 낮습니다. 그런데 그 구성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학생들의 성적이 5%씩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대략 20% 정도의 학생들이 중간고사보다 25% 이상 점수가 낮아집니다. 저는 이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냅니다.

“잘 지내나요? 이번 퀴즈 결과를 보니 중간고사보다 많이 점수가 낮아졌더라구요. 물론 이번 퀴즈는 전체 학점에 10% 비중이기 때문에, 이번 점수가 낮다는 사실로 내가 학생의 성적에 대해서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무슨 일이 있나 걱정도 되고 해서 메일 보냅니다.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그리고, 혹시 학생을 돕기 위해 내가 수업을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는지 제안할 점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이런 메일을 보내면, 그 중에서 몇몇 학생들은 저를 찾아오겠다고 답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들에게 제가 공부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조언은 없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어차피 스스로 하는 것이고, 저는 제가 가르치는 내용을 “어떻게 공부해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일대일로 만나면, 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열아홉이라는 시기에 대한 막막함과 조급함에 대한 이야기, 가족이나 친구와 관련된 이야기등을 듣고 나서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힘내라는 공허한 격려 뿐이지만, 그래도 저는 이맘때쯤 만나는 이 친구들과의 시간이 참 좋습니다. 예전에는 열정 없는 학생들이 참 답답했었는데, 요즘은 그런 친구들과 – 적어도 열아홉살 학부생의 경우에는 – 나누는 넋두리가 참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교육방송 청소년 드라마와는 다르게, 이런 만남 이후에 학생들이 갑자기 달라져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든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업에서 개인적으로 만나면서 관계를 맺은 학생들 중에서는, 졸업할 때 상을 받는다든지 유명한 회사에 취업한다든지 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맘때쯤의 만남들은,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거나 변화의 계기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제 마음의 자리를 본래 보냄받은 자리에 비끌어매기 위해 저에게 주어지는 경고이자 선물인 듯 합니다.

3월은 봄이 아니다

마케팅에서도 많이 인용되는 심리학 이론으로 confirmation bias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계속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자신의 기존 지식이나 믿음에 어긋나는 사실을 접할 때에는 “그럴 리가 없다”거나 “이건 예외적일 거야” 혹은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라며 현실을 부정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반면,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발견할 때면 “그럼 그렇지”라며 훨씬 더 쉽게 그것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기존 신념을 강화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 bias입니다. 모든 bias들이 다 그렇지만, 이 confirmation bias는 우리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것도 우리의 무능이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 편향성과 고집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에 참 무섭고도 안타까운 우리의 부족함입니다.

몬트리올에서 3월의 날씨는 한겨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보통 겨울외투는 4월 중에 벗고, 마지막 눈은 5월에 오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중에 많이 춥거나 오늘처럼 폭설이 내리는 날이면, 1월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눈을 조금 신기하게 여기고 사람들과의 small talk 주제로 삼습니다.

저도 이제 Los Angeles 지역에서 보낸 기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이 곳 몬트리올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매년 3-4월의 날씨에 놀라고 아쉬워하는 제 모습이 사실은 더 놀랍고 아쉽습니다. ^^ 고집과 미련때문에 미루어 온, 이제는 그냥 좀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쌓여가는데, 그 중에서 우선 3월은 봄이 아님을 인정해야겠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CBC news에서 가져온 오늘 몬트리올의 풍경입니다.

March2018 Montreal 1March2018 Montreal 2

절실함

“우리가 광고에서 흔하게 듣는 ‘값싸고 품질좋은’이란 말은 사실 모순입니다.”

대학교 1학년 첫학기 어느 경제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가격과 품질은 적어도 거시적으로는 양의 상관관계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 교수님이 덧붙여 설명하신 것처럼, 같은 가격대의 다른 상품들보다 품질이 좋다거나 비슷한 수준의 품질을 지닌 경쟁제품들보다 가격이 낮다는 의미의 광고였을 테고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 표현입니다. 물건을 만들 때에도, 가격대를 설정한 후에 품질을 극대화하든지 품질의 수준을 정한 후에 가격을 낮추려고 해야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추구하면 방향성과 구심점을 잃게 됩니다.

비슷한 예로, 노력을 다하되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 역시 실재적 모순입니다. 비슷한 노력을 하는 다른 이들보다 결과에 초연한 사람도 있고 자신이 집착하는 정도에 비해서 더 열심인 경우도 있겠으나, 노력과 집착의 관계는 가격과 품질의 관계 이상으로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간혹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사실은 “노력을 다하되 집착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거기에 집착하는 것일 뿐입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 과정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가격과 품질 사이의, 그리고 노력과 집착 사이의 trade off dillemma에서 사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각자 나름의 균형(balance)입니다. 경제학에서는 equilibrium이라고 하지요.

균형점이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조언하는 일은 커녕 자신의 균형점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내가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 열심은 집착일까 아닐까 하는 고민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더 힘을 내야 한다는 걸, 또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걸음을 떼기가 어려운 때도 있지요.

이 노래, 가사, 가수, 기타 참 좋네요.

신영복 선생님은 겨울보다 여름 징역이 더 아픈 이유를,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했지요. 옆으로 누워서 자야 하는 좁은 공간 속에서 다른 사람을 그 존재 자체만으로 미워하게 되는 것을, 그는 “형벌 중의 형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감옥살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탓하게 되는 것은 정말로 사람이 겪는 어려움의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연구실적이 미흡해서 학교에서 저의 테뉴어 여부가 불투명합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제 노력과 능력의 (중간)결과이지만, 저로서는 아쉬운 장면들이 많습니다. 제 시간과 노력을 많이 썼는데 중간에 연구를 중단해 버린 공동연구자, 우리 페이퍼를 (제 생각에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어느 저널에 내자고 했지만 그 사람의 욕심에 더 높은 수준의 저널들에 여러 번 시도했다 실패해서 2년이 넘게 시간을 허비한 공동연구자, 그리고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 부당한 대우로 제 연구 시간을 빼앗은 그 당시 학과장, 그리고… 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경우들도 있겠습니다.

이 중에서 대부분은 그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일이고, 어떤 경우는 제 나름대로 힘들게 그 사람을 용서(했다고 생각)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하나하나가 아쉬워집니다. 그 때 다르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것이지요.

그 중에서 제가 가장 크게 원망하는 사람과 지난 주에 언쟁을 했습니다. 표면적인 언쟁 내용은 연구에 관한 것이었지만, 사실 제 쌓인 감정이 터진 것입니다.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서 책상 앞에 멍하게 앉아 있다가 위에 적은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감옥살이, 그것도 억울한 징역살이와는 비교도 안되는 제 지금 상황에서조차 오늘의 현실을 타인을 향한 증오로 귀결시킨다면, 정말이지 더불어 숲을 이룰 첫걸음조차 막연할 것입니다.

누구 탓도 아닙니다.
그리고 누구 탓이라 한들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forest toge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