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함

“우리가 광고에서 흔하게 듣는 ‘값싸고 품질좋은’이란 말은 사실 모순입니다.”

대학교 1학년 첫학기 어느 경제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가격과 품질은 적어도 거시적으로는 양의 상관관계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 교수님이 덧붙여 설명하신 것처럼, 같은 가격대의 다른 상품들보다 품질이 좋다거나 비슷한 수준의 품질을 지닌 경쟁제품들보다 가격이 낮다는 의미의 광고였을 테고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 표현입니다. 물건을 만들 때에도, 가격대를 설정한 후에 품질을 극대화하든지 품질의 수준을 정한 후에 가격을 낮추려고 해야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추구하면 방향성과 구심점을 잃게 됩니다.

비슷한 예로, 노력을 다하되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 역시 실재적 모순입니다. 비슷한 노력을 하는 다른 이들보다 결과에 초연한 사람도 있고 자신이 집착하는 정도에 비해서 더 열심인 경우도 있겠으나, 노력과 집착의 관계는 가격과 품질의 관계 이상으로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간혹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사실은 “노력을 다하되 집착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거기에 집착하는 것일 뿐입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 과정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가격과 품질 사이의, 그리고 노력과 집착 사이의 trade off dillemma에서 사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각자 나름의 균형(balance)입니다. 경제학에서는 equilibrium이라고 하지요.

균형점이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조언하는 일은 커녕 자신의 균형점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내가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 열심은 집착일까 아닐까 하는 고민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더 힘을 내야 한다는 걸, 또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걸음을 떼기가 어려운 때도 있지요.

이 노래, 가사, 가수, 기타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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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님은 겨울보다 여름 징역이 더 아픈 이유를,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했지요. 옆으로 누워서 자야 하는 좁은 공간 속에서 다른 사람을 그 존재 자체만으로 미워하게 되는 것을, 그는 “형벌 중의 형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감옥살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탓하게 되는 것은 정말로 사람이 겪는 어려움의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연구실적이 미흡해서 학교에서 저의 테뉴어 여부가 불투명합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제 노력과 능력의 (중간)결과이지만, 저로서는 아쉬운 장면들이 많습니다. 제 시간과 노력을 많이 썼는데 중간에 연구를 중단해 버린 공동연구자, 우리 페이퍼를 (제 생각에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어느 저널에 내자고 했지만 그 사람의 욕심에 더 높은 수준의 저널들에 여러 번 시도했다 실패해서 2년이 넘게 시간을 허비한 공동연구자, 그리고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 부당한 대우로 제 연구 시간을 빼앗은 그 당시 학과장, 그리고… 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경우들도 있겠습니다.

이 중에서 대부분은 그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일이고, 어떤 경우는 제 나름대로 힘들게 그 사람을 용서(했다고 생각)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하나하나가 아쉬워집니다. 그 때 다르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것이지요.

그 중에서 제가 가장 크게 원망하는 사람과 지난 주에 언쟁을 했습니다. 표면적인 언쟁 내용은 연구에 관한 것이었지만, 사실 제 쌓인 감정이 터진 것입니다.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서 책상 앞에 멍하게 앉아 있다가 위에 적은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감옥살이, 그것도 억울한 징역살이와는 비교도 안되는 제 지금 상황에서조차 오늘의 현실을 타인을 향한 증오로 귀결시킨다면, 정말이지 더불어 숲을 이룰 첫걸음조차 막연할 것입니다.

누구 탓도 아닙니다.
그리고 누구 탓이라 한들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forest together

진짜로 원하는 것

“아빠,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오웬이는 자신이 조심스럽고 망설여지는 주제의 이야기를 주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도 차 안에서 오웬이가 이 질문으로 대화를 열었습니다. “그럼, 물론이지.” 제 답은 늘 같습니다.

“나는 진짜로 소피아랑 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벌써 몇주째 같은 고민입니다. 같은 반에 소피아라는 여자아이가 있는데 그 친구가 인기가 좋아서 (많은 아이들이 그 아이와 놀고 싶어해서) 오웬이는 소피아랑 놀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소피아와 놀고 싶은지 이유를 물으니 몇 가지 답을 합니다. 물론 오웬이가 말한 이유들도 사실이겠지만, 제가 짐작하는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소피아가 인기 있는 아이라는 것입니다.

오웬이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 다른 친구가 재미있게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갖는 것, 인기 있는 아이와 친구가 되는 것 등을 좋아합니다. 저도 육아경험이 없으니 다른 아이들도 어느 정도 그런 건지, 제가 뭘 잘못 가르쳐서 그런건지, 아니면 그냥 자기 성향이니 그래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저는, 오웬이 나이때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국민학교에 다닐때부터 반골 기질이 있어서 남들이 다 좋아하는 대상은 바로 그 이유로 선호를 피했더랬습니다. 한참 농구경기를 보러 다닐 때에도 이충희나 김현준 같은 스타 선수의 팬은 해 보지 않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선호를 연구하는 걸 직업으로 갖게 된 후에 돌아보니, 누군가를 따라하는 것이나 혹은 누군가와 달라지고 싶어하는 것 모두 기본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의 귀결입니다.

오웬이는 왜 소피아랑 놀고 싶은 것일까요
저는 왜 이충희의 팀을 응원하면서도 이충희는 응원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왜 학교에서 테뉴어를 받고 싶어하는 걸까요

아, 참고로 소피아는 같은 반의 샤흘릇(Charlotte)이라는 여자 아이와 쌍둥이인데, 오웬이 말에 따르면 샤흘릇은 오웬이를 좋아해서 오웬이와 놀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

개강

오늘 겨울학기 (미국에서는 봄학기라고 부르고 캐나다에서는 겨울학기라고 부릅니다) 개강입니다. 저는 가을학기에는 대학원 수업만 하나 하고 겨울에는 학부 과목을 세 개 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겨울학기에는 수업에 시간을 많이 쓰게 되지요. 수업이라는 걸 한지도 거의 10년이 되어가지만 학부 수업은 저에게 참 힘든 일입니다.

first day

넵! 바로 그 때가 왔습니다.

막상 겪어 보니

2년쯤 전부터 시작된 노안(presbyopia)이 이제 많이 진행되어서, 제 생활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장점부터 꼽아보자면, 밤에 침대에 누워서 쎌폰을 확인할 때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나 샤워하고 난 후에 안경을 쓰지 않아도 아주 가까운 곳을 이전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반면에 작은 글자로 된 글을 읽을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큰 불편함인데요, 그 중에서도 저널(학술지)을 책으로 읽지 못하는 것이 제 일상생활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입니다. 페이퍼를 읽는 일은 제 하루 일과의 큰 부분이기 때문에 이건 정말 큰 변화입니다. 이제 페이퍼(논문)는 화면을 확대해서 모니터로만 봅니다.

제가 페이퍼라는 것을 읽기 시작한 석사과정 1년차에도 (2003년) 대부분의 페이퍼는 PDF로 되어 있어서 종이로 된 책 대신 모니터에서 읽을 수 있었고, Google Scholar (페이퍼 검색 엔진, 2004)과 Dropbox(2007)을 사용하게 된 이후로는, 대부분의 동료들이 페이퍼를 모니터로 읽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도 늦게까지 – 최근까지 – hard copy journal을 읽었습니다만, 이제 저에게 모니터냐 종이냐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게 되었네요. 그래서 올해부터는 저널의 정기구독도 중단했습니다. 안그래도 coding이나 writing등으로 모니터 보는 시간이 많은데, 이제는 그나마 페이퍼 읽는 시간도 모니터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종이로 페이퍼를 읽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막상 “할 수 없이” 모니터로 읽다 보니 이것도 금방 적응이 되네요. LA에서 이 곳 몬트리올로 이사왔을 때 번거롭게 느껴졌던 아침마다 일기예보를 챙겨서 보는 것이나 겨울 아침에 차고 앞의 눈을 치우기 위해서 10분 더 일찍 일어나는 일도, 막상 해 보니 크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이외수의 소설 “들개”에서, 자신의 야성을 찾기 위해 산 속에서 씻지도 않고 살아가는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은 씻는 습관을 가졌고, 나는 씻지 않는 습관을 가졌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던 것처럼, 많은 일들이 실제로 겪어 보면 그것에 대해서 미리 우려하고 두려워하던 것보다는 훨씬 더 쉽게 일상으로 녹아드는 것 같습니다.

새 해에 있을지도 모를 변화들에 기대보다는 두려움을 갖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험심을 잃어가는 피할 수 없는 변화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두려움을 걷어내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올 한해가 되기로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