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

오랜 노력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을 때, 인기 있는 사람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는 순간, 나중에 꼭 기억하고 싶을만큼 특별한 장소에 다녀왔을 때, 제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때… 이 순간과 기분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기도 합니다. 다르게 이름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나눔을 자랑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습니다.

자랑을 왜 하는 걸까요?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우월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부자도 아니고 부자인 척 할 마음도 전혀 없는 사람이 오랫동안 아껴 모은 돈으로 제법 비싼 멋드러진 휴양지에 다녀온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그 곳에 갈 비용은 꿈도 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박탈감과 좌절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대체로 스스로도 그 순간이 신기하고 감격스럽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의 승진, 자식의 명문대 합격, 누군가로부터 받은 감사 편지 또한 그렇지요.

특정 이야기의 소재가 꼭 자랑으로 귀결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마음이 힘든 사람을 위로한 이야기나 집에 온 손님을 정성스럽게 대접한 후기는 이야기 전체의 주인공으로 누가 드러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분위기의 글이 됩니다. 겸손한 반성처럼 보이는 자랑도 있고, 어떤 대회에서 1등한 이야기를 적었는데도 글쓴이를 부러워하는 마음도 일으키지 않은 채 깊은 배움과 따뜻한 감동만 남겨주는 글도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참 무섭습니다. 제가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든지, 제 인격은 어떻게든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이미 잘 알려진 연구결과와 우리의 경험에서처럼,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의 사용은 우리의 우울함(depression)을 유발합니다. 다른 사람의 큐레이트된 삶의 단편이 나의 현실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지요. 열등감과 우울함은 아래를 향하는 나선계단 같아서, 이렇게 현실을 비교하면서 생기는 우울함은 열등감을 낳고, 열등감을 입고 현실을 대하면 나의 삶을 더욱 비교의 대상으로 놓게 되어 우울함이 깊어집니다.

소셜미디어가 없던 시절을 떠올려 보니, 요즘 사람들이 자랑하는 일을 좀 더 많이 할 뿐 아니라 망설임 없이 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자랑하고 싶어도 왠지 멋적기도 하고 유난 떤다는 반응이 두렵기도 해서 망설이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는데, 요즘 온라인의 글들 (제 블로그도 물론 포함입니다)을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자랑질이 봇물을 이룹니다.

자랑이 나쁜 것일까요? 어떤 하나의 행동범주를 좋거나 나쁜 것으로 평하는 일은 섣부른 것이겠죠. 다만 저는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으로 스스로를 경계하려고 합니다. 이 거울에 저를 비추면, 제가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받을 박탈감이나 제가 도움이랍시고 간섭한 말과 행동의 불완전함이 만들어내는 공간들이 더 무거워집니다.

오스 기니스는 우리 삶을 달리기 경기라고 할 때 그 경기의 유일한 관중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자랑을 삼가려는 인내와 다른 사람의 자랑에 우울해지지 않으려는 안간힘 양면에서 저에게 큰 응원이 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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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보다는 소망

몬트리올의 겨울이 힘든 것은 추위보다는 어두움입니다. 대부분의 날에 눈이 오기 때문에 늘 어둡고, 어쩌다가 맑은 날에도 오후 3시쯤이면 노을이 지기 때문에 제 의지와 상관 없이 하루를 마감하라고 재촉받는 기분입니다.

지난 주에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를 지난 이후로는, 낮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봤자 일주일동안 낮의 길이가 2분 정도 늘었으니, 긴 어두움의 겨울은 이제 시작일 뿐이지요. 낮의 길이를 느끼지는 못해도 어제보다 오늘 낮이 조금 더 길다는 생각은 저에게 활력을, 오늘보다 내일 낮이 더 길 것이라는 기대는 희망을 줍니다.

한 해 중에서 낮이 가장 짧은 날이 낮에 대한 희망의 정점이 되다니, 자연스럽고도 역설적입니다. 한 해를 1% 남겨 놓은 지금의 상실감과 절망도 동지(冬至)밤처럼 소망의 단초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기쁨보다는 소망으로 사는 것이니까요.

소통의 채널

제가 사는 지역의 대부분의 TV 채널은 불어로 나오지만, (당연한 이유로) 저희 집은 영어로 방송하는 몇 안되는 채널을 시청합니다. 오웬이가 아기였을 때부터 제가 읽어준 책은 한국어와 영어 뿐이었고, 함께 Netflix를 시청하거나 영화관에 가서도 영어로 된 영화만 봤으며, 교회에서도 영어만 사용하고, 오웬이와 함께 어울리는 가정도 모두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제 학교에 가는 길에 오웬이에게 불어로 하는 만화영화를 다 알아듣는지 물었더니, 오웬이 말이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영어보다는 더 많이 알아듣는다고 답했습니다.

오웬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저희 학교로 걸어서 출근하면서 생각해 보니, 요즘 저녁에 제가 오웬이를 데리러 학교에 갔을 때 친구들과 불어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작년에만 해도 불어는 수업 시간에만 쓰고 친구들과는 영어로 이야기했었는데 말이죠.

하기야 오웬이는 이 곳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있으니 불어가 제1언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그래도 제가 잘 알아 듣지도 못하는 언어를 제 아이가 가장 편한 언어로 굳혀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펐습니다.

예전에 이 곳 한인교회에서 청소년부를 담당하던 목사님과 대화중에, 이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곳의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과 소통이 어려운 이유로 자신이 불어를 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지만, 이 목사님이 볼 때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언어때문은 아닌 것 같다고.

오웬이와 말이 점점 통하지 않게 되더라도, 말보다 더 소중하고 단단한 소통의 채널을 서로의 마음 속에 꾸준히 다져 나가야겠습니다.

든든한

작은 일에도 긴장을 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는 오웬이는 저를 닮았습니다. 뒤져보면 저에게도 장점들이 있을텐데 왜 꼭 그런 걸 닮는지, 짠하고 미안합니다.

오웬이가 차 안에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저 아저씨는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서 길에서 자고 사람들한테 돈 달라고 하잖아. 그런데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되면 어떡해? 저 아저씨도 어렸을 때는 아빠 엄마도 있고 집도 있었을 거잖아. 나도 나중에 엄마 아빠가 죽고 나서 저렇게 되면 어떡해?

걱정이 많은 아이임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좀 당황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세 가지 답변을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1) 우리가 저런 아저씨들에게 돈도 주고 계속 도와 주면, 나중에 오웬이가 어른이 될 때에는 저런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될 거야.
(2) 저 아저씨가 지금은 배고프고 불편하게 살고 계시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저 아저씨가 필요한 것들을 저 아저씨한테 꼭 주실 거야.
(3) 아빠가 영원히 죽지 않고 오웬이 먹을 거랑 필요한 장난감을 계속 사 줄거야.

1번은 제가 믿지 않는 내용이고
2번은 여섯 살 아이에게 전달하기 어려운 내용이고
3번은 왠지 질문을 피하는 답변 같았습니다.

결국 1번을 택해서 오웬이에게 말해 주었는데, 3번으로 말할걸 하는 후회가 남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아빠가 되는지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모르겠지만, 좋은 것을 알려주는 아빠보다는 든든한 아빠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그럼에도 제 스스로가 자신이 없어서인지 선뜻 3번답을 주지 못하고 1번같은 말을 더 많이 하게 되네요. 그래도 이렇게 글로 한번 남김으로써, 다음에는 3번답을 해야지 하고 다짐합니다.

좀더 개념을 좁혀서 사용하면

경영학계뿐 아니라 경영 실무에서 big data analysis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아직도 이러한 트렌드는 꺾이지 않아서, 회사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나 심지어 학교에서 교수를 뽑을 때에도 이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사람을 찾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big data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에는 일반적은 동의가 없어 보입니다. 일차적인 의미는 기존의 통계적 모델로는 분석하기 어려울 만큼 큰 크기의 data를 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 뿐이라면 hardware 기술이 발전해서 RAM size와 CPU cores가 늘어나기만 하면 오늘 big data인 것이 내일은 big data가 아니게 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data의 size만 가지고 big data 여부를 가늠하는 것은 부족하다는 말이지요.

제가 이해하는 바로 big data는 data의 dimension이 너무 크거나, 숫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data를 가리킵니다. 한 예로 요즘 저희 분야에서 유행하는 topic 중의 하나는, Instagram에 posting하는 사진들을 가지고 그 사람의 성향과 제품선호 등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사진들은 분명히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것이 이 사람이 A라는 brand를 얼만큼 좋아하는지를 통계 모델에 적합한 숫자로 변환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보통 이런 것을 (혹은 적어도 이런 것도) big data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big data analysis라는 것이 지금까지 없던 분야이며 매력적이고 필요한 tool임은 분명하지만, 현존하는 모든 계량경제학적 모델을 대체할 만큼 광범위한 패러다임까지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big data analysis라는 분야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Big data analysis는 새 것이고 좋은 것이며, 나머지 모델들은 대체적으로 그보다 못한 것이라는 착각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구요.

그런데 경영분야에서 big data와 마찬가지로 기독교계에서 하나님 나라 역시 그 개념이 모호한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으로서, 요즘 기독교계에서 새롭게 내는 프로그램이나 책에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조금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특별히 기독교 서적의 제목에 사용되는 하나님 나라는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유행에 따른 추가표현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Amazon에서 검색되는 big data analysis 관련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가 그 일차적의 의미대로 그 분의 다스리심을 가리키는 것 뿐이라면, 진지하게 예수를 따르는 사람 모두가 자신이 믿는 신앙을 하나님 나라 신학이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사야서가 그리는 하나님 나라와 요한복음이 설명하는 하나님 나라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구분 없이 각자가 예수를 따르는 방식 그대로를 하나님 나라 신학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이 표현 자체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게 되겠지요.

여름을 맞아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중에 일요일을 맞아서 부모님댁 앞에 있는 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주보와 광고, 그리고 예배중 기도에서도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많았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읽는 QT책 제목에도 하나님 나라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어떤 면에서 이 교회가 하나님 나라 신학을 지향하는지 분명히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을 본문으로 한 “처음 사랑을 되찾자”는 주제의 설교였는데요, “여러분, 처음에 믿으셨던 그 감격을 아직도 간직하고 계십니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정이 그 때만큼 뜨겁습니까?”의 도전도, 설교 후 옆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건넨 “처음 사랑을 되찾읍시다”라는 권면도, 제가 나름대로 그리고 있던 하나님 나라 신학과의 연결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제 편견일 수 있지만, 이렇게 개인 신앙의 간절한 열심과 온전한 순수함을 강조하는 색깔은, 오늘 본문을 감안하더라도,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이렇게까지 중심에 자리하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오늘 설교에서 당시 소아시아 교회의 상황은 묘사되었지만, 그것이 하나님 나라 선교의 관점에서 설명되지는 않았습니다.

설교는 진중했고 진솔했으며 꼼꼼하기도 했습니다. 듣는 저에게 반성할 부분과 곱씹을 내용을 모두 던져 주었습니다. 다만, 이 교회가 왜 이렇게까지 하나님 나라 신학을 전면으로 표방하는지가 좀 의아했을 뿐입니다.

Big data analysis나 하나님 나라 신학이 기존의 것보다 모든 면에서 더 좋은 것은 아닐진대, 좀더 개념을 좁혀서 사용하면 어떨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