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개념을 좁혀서 사용하면

경영학계뿐 아니라 경영 실무에서 big data analysis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아직도 이러한 트렌드는 꺾이지 않아서, 회사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나 심지어 학교에서 교수를 뽑을 때에도 이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사람을 찾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big data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에는 일반적은 동의가 없어 보입니다. 일차적인 의미는 기존의 통계적 모델로는 분석하기 어려울 만큼 큰 크기의 data를 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 뿐이라면 hardware 기술이 발전해서 RAM size와 CPU cores가 늘어나기만 하면 오늘 big data인 것이 내일은 big data가 아니게 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data의 size만 가지고 big data 여부를 가늠하는 것은 부족하다는 말이지요.

제가 이해하는 바로 big data는 data의 dimension이 너무 크거나, 숫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data를 가리킵니다. 한 예로 요즘 저희 분야에서 유행하는 topic 중의 하나는, Instagram에 posting하는 사진들을 가지고 그 사람의 성향과 제품선호 등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사진들은 분명히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것이 이 사람이 A라는 brand를 얼만큼 좋아하는지를 통계 모델에 적합한 숫자로 변환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보통 이런 것을 (혹은 적어도 이런 것도) big data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big data analysis라는 것이 지금까지 없던 분야이며 매력적이고 필요한 tool임은 분명하지만, 현존하는 모든 계량경제학적 모델을 대체할 만큼 광범위한 패러다임까지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big data analysis라는 분야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Big data analysis는 새 것이고 좋은 것이며, 나머지 모델들은 대체적으로 그보다 못한 것이라는 착각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구요.

그런데 경영분야에서 big data와 마찬가지로 기독교계에서 하나님 나라 역시 그 개념이 모호한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으로서, 요즘 기독교계에서 새롭게 내는 프로그램이나 책에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조금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특별히 기독교 서적의 제목에 사용되는 하나님 나라는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유행에 따른 추가표현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Amazon에서 검색되는 big data analysis 관련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가 그 일차적의 의미대로 그 분의 다스리심을 가리키는 것 뿐이라면, 진지하게 예수를 따르는 사람 모두가 자신이 믿는 신앙을 하나님 나라 신학이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사야서가 그리는 하나님 나라와 요한복음이 설명하는 하나님 나라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구분 없이 각자가 예수를 따르는 방식 그대로를 하나님 나라 신학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이 표현 자체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게 되겠지요.

여름을 맞아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중에 일요일을 맞아서 부모님댁 앞에 있는 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주보와 광고, 그리고 예배중 기도에서도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많았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읽는 QT책 제목에도 하나님 나라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어떤 면에서 이 교회가 하나님 나라 신학을 지향하는지 분명히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을 본문으로 한 “처음 사랑을 되찾자”는 주제의 설교였는데요, “여러분, 처음에 믿으셨던 그 감격을 아직도 간직하고 계십니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정이 그 때만큼 뜨겁습니까?”의 도전도, 설교 후 옆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건넨 “처음 사랑을 되찾읍시다”라는 권면도, 제가 나름대로 그리고 있던 하나님 나라 신학과의 연결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제 편견일 수 있지만, 이렇게 개인 신앙의 간절한 열심과 온전한 순수함을 강조하는 색깔은, 오늘 본문을 감안하더라도,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이렇게까지 중심에 자리하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오늘 설교에서 당시 소아시아 교회의 상황은 묘사되었지만, 그것이 하나님 나라 선교의 관점에서 설명되지는 않았습니다.

설교는 진중했고 진솔했으며 꼼꼼하기도 했습니다. 듣는 저에게 반성할 부분과 곱씹을 내용을 모두 던져 주었습니다. 다만, 이 교회가 왜 이렇게까지 하나님 나라 신학을 전면으로 표방하는지가 좀 의아했을 뿐입니다.

Big data analysis나 하나님 나라 신학이 기존의 것보다 모든 면에서 더 좋은 것은 아닐진대, 좀더 개념을 좁혀서 사용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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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잣대

철이 들수록 (혹은 그냥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에게 지적질하는 게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다행한 일이지요. 다른 이들을 더 존중하게 되어서 그런 것이라면 더 좋겠지만 솔직히 그건 아직 아닌 것 같고요, 제가 비판하는 일을 제 자신도 행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 순간들이 많아지면서부터입니다. 비판 대신에 더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으로 자연스레 생각하게 됩니다…

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몇달 전에 오웬이가 학교에서 턱을 다쳐서 왔습니다. 다른 곳을 보면서 뛰어가다가 학교 놀이터에 있는 시설물에 부딪혔답니다. 안전에 관한 것이 아니면 아이를 혼내지 않으려고 노력은 합니다만, 솔직하게는 그 노력으로 쌓아 두었던 화가 안전에 관해서 혼낼 때 몰아서 나가는 것이 아닌가 반성을 하게 될 정도로, 그날 오웬이에게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며칠 전 아침에 제 오피스를 나서서 바로 모서리를 돌고 나니 이런 게 있었습니다. 제 직장의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이 무렵에는 학교에서 벽 페인트를 다시 하곤 하는데요, 오늘이 시작인가 봅니다. 복사실로 가는 길에 복사할 페이퍼를 보면서 모퉁이를 돌다가 그만… 쾅. 크게 다치거나 한 건 물론 아니지만, 안경테가 조금 휘었고 코피도 좀 났습니다.

앞에 적은 것처럼, 남보다는 나를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고 안심하고 자만했는데, 아직은 심지어 6살 제 아들에게도 훈계한답시고 이중잣대를 내밀고 있었네요.

painting station

채점, 둘

채점하는 일의 가장 큰 어려움을 꼽으라면, 제 자신이 피폐해진다는 것입니다. 채점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일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서 지적(질)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며칠동안 그 일을 하다 보면 제 스스로의 모습이 정말 마음에 안들게 됩니다. 그렇게 변한다기보다는 그런 치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겠죠.

그래서 채점하는 기간에는 제 스스로가 피폐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일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고,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하는 일 따위는 안합니다.

삶이란 어쩌면 자신에게 적응해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하면 덜 나빠질 수 있는지, 어떤 것은 인정해야 하는지 등을 하루하루 배워가고 있습니다.

채점, 하나

제가 그룹 성경공부를 할 때 “…해도 되냐?”라는 질문에 (언제나는 아니지만) 종종 하는 반문이 있습니다.

“저도 그 부분이 궁금하기는 해요. 물론 저도 답은 없구요. 그런데 저는 동시에 이런 궁금함도 생기더라구요. 된다/안된다가 무슨 뜻일까요? 된다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거나 말거나 별로 관심이 없으시다는 뜻일까요? 안된다는 것은 그렇게 하면 거기에 따른 처벌이 있다는 뜻일까요?”

복음이라는 삶의 거대한 길잡이 앞에서 무엇무엇을 해도 되나요 혹은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은 대체로 방향성 상실의 표현인 경우가 많습니다.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궁금함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반경이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하고 싶은 욕심이 아닐까요.

사회과학 대부분의 과목이 그렇듯이, 제 과목에도 학기말 페이퍼(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시험과 달리, 각자 주제와 연구방법을 정하는 항목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서 학생들이 저에게 질문을 많이 합니다. 따로 시간을 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래도 저로서는 정해진 지식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어떤 자료를 찾아봐야 하는지, 찾은 자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해당분야에 어떤 이론들이 있는지, 이 통계들은 어떤 모델을 이용해서 분석해야 하는지를 학생들이 물으면, 저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학생들의 질문을 듣고 답하는 시간은 대체로 즐겁지만, 저를 힘빠지게 하는 질문도 하나 있는데요, 바로 “이거이거를 꼭 해야 하나요? 안해도 되나요?”입니다.

성경공부의 경우에는 물론 그런 질문을 한 자체에 대해서 질책하거나 면박을 주면 절대 안되겠지요. 게다가 질문 자체를 막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없던 열정을 갖게 될리도 없겠구요. 다만, 본인이 그런 질문을 왜 갖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계기를 주려는 노력은 (적어도 때로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성경공부때만큼은 아니지만, 제 수업의 기말 프로젝트의 경우에도 그런 질문 자체에 면박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은 합니다. 물론 저의 그러한 노력은 아직도 많이 부족해서, 학생들에게 제 짜증이 전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의 이런 부족함을 가리기 위해 가끔은 웃으며 이렇게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 자료 찾아보면 어떤 내용이 있을지 저는 개인적으로 궁금하네요. 학생도 궁금하죠?” ^^

결국에 페이퍼를 읽어보며 채점을 해 보면, 그런 질문을 한 학생들은 그들이 질문한 그 부분을 했든 안했든 상관없이 페이퍼의 수준이 높지 않습니다. 본인이 이 주제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로 이 과제를 억지로 했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적어도 이 주제를 좋아하고 업으로 삼고 있는 저는 그 차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결론은 성경공부에 동일하게 적용하기는 많이 조심스럽네요.)

글쓴이가 억지로 쓴 글을 읽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인데, 바야흐로 학기말이 다가오니 이제 바로 그 일을 할 때가 왔습니다. 진하게 커피 한잔 마시고 채점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덧) 물론 되나 안되나 하는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하면 안됩니다. 위험하니까요. 그런데 요즘 이놈이 그 안되는 일들을 점점 더 많이 합니다. @.@

이맘때쯤 만나는 사람들

저는 가을학기에는 대학원 수업을, 겨울학기에는 학부 수업을 합니다. 올해도 여느해처럼 제가 맡은 학부 수업은 1학년 마케팅 기초 과목인데요, 몇몇 사연이 있는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열아홉살입니다. (이 곳에서는 100% 고등학교 성적으로 대학을 진학하기 때문에 재수를 하는 학생이 없습니다.)

열아홉이라는 나이는 정말 어린 나이지요. 제 열아홉살을 돌아보면 이불킥을 그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게다가 대학의 두 번째 학기는 대학생활의 신기함과 열정올 잃어갈 때이고, 퀘벡 출신이 아닌 학생들은 어둡고 추운 겨울이 길어지면서 집도 그립고 우울증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독감이라도 한번 걸리면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차게 되지요. 대학에서 새로 사귄 연인과 헤어지는 일도 많은 시기이구요. 수업에서만 만나는 학생들의 속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일들만 나열해도 이들의 삶이 녹록치 않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출석을 점검하지 않는 제 수업에는 2월 중순쯤이 지나면 빈 자리가 크게 늘어납니다. 1학년이니만큼 수업을 안나오는 대신 신나게 놀러 다니기라도 한다면 다행이겠지만, 실제로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업을 안나오는 학생들 대부분은 그냥 무기력하고 우울해하면서 집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지난 주에는 수업에서 퀴즈를 봤습니다. 중간고사보다 문제를 쉽게 내지만 평균은 약 5%쯤 더 낮습니다. 그런데 그 구성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학생들의 성적이 5%씩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대략 20% 정도의 학생들이 중간고사보다 25% 이상 점수가 낮아집니다. 저는 이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냅니다.

“잘 지내나요? 이번 퀴즈 결과를 보니 중간고사보다 많이 점수가 낮아졌더라구요. 물론 이번 퀴즈는 전체 학점에 10% 비중이기 때문에, 이번 점수가 낮다는 사실로 내가 학생의 성적에 대해서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무슨 일이 있나 걱정도 되고 해서 메일 보냅니다.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그리고, 혹시 학생을 돕기 위해 내가 수업을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는지 제안할 점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이런 메일을 보내면, 그 중에서 몇몇 학생들은 저를 찾아오겠다고 답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들에게 제가 공부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조언은 없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어차피 스스로 하는 것이고, 저는 제가 가르치는 내용을 “어떻게 공부해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일대일로 만나면, 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열아홉이라는 시기에 대한 막막함과 조급함에 대한 이야기, 가족이나 친구와 관련된 이야기등을 듣고 나서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힘내라는 공허한 격려 뿐이지만, 그래도 저는 이맘때쯤 만나는 이 친구들과의 시간이 참 좋습니다. 예전에는 열정 없는 학생들이 참 답답했었는데, 요즘은 그런 친구들과 – 적어도 열아홉살 학부생의 경우에는 – 나누는 넋두리가 참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교육방송 청소년 드라마와는 다르게, 이런 만남 이후에 학생들이 갑자기 달라져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든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업에서 개인적으로 만나면서 관계를 맺은 학생들 중에서는, 졸업할 때 상을 받는다든지 유명한 회사에 취업한다든지 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맘때쯤의 만남들은,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거나 변화의 계기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제 마음의 자리를 본래 보냄받은 자리에 비끌어매기 위해 저에게 주어지는 경고이자 선물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