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원하는 것

“아빠,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오웬이는 자신이 조심스럽고 망설여지는 주제의 이야기를 주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도 차 안에서 오웬이가 이 질문으로 대화를 열었습니다. “그럼, 물론이지.” 제 답은 늘 같습니다.

“나는 진짜로 소피아랑 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벌써 몇주째 같은 고민입니다. 같은 반에 소피아라는 여자아이가 있는데 그 친구가 인기가 좋아서 (많은 아이들이 그 아이와 놀고 싶어해서) 오웬이는 소피아랑 놀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소피아와 놀고 싶은지 이유를 물으니 몇 가지 답을 합니다. 물론 오웬이가 말한 이유들도 사실이겠지만, 제가 짐작하는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소피아가 인기 있는 아이라는 것입니다.

오웬이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 다른 친구가 재미있게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갖는 것, 인기 있는 아이와 친구가 되는 것 등을 좋아합니다. 저도 육아경험이 없으니 다른 아이들도 어느 정도 그런 건지, 제가 뭘 잘못 가르쳐서 그런건지, 아니면 그냥 자기 성향이니 그래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저는, 오웬이 나이때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국민학교에 다닐때부터 반골 기질이 있어서 남들이 다 좋아하는 대상은 바로 그 이유로 선호를 피했더랬습니다. 한참 농구경기를 보러 다닐 때에도 이충희나 김현준 같은 스타 선수의 팬은 해 보지 않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선호를 연구하는 걸 직업으로 갖게 된 후에 돌아보니, 누군가를 따라하는 것이나 혹은 누군가와 달라지고 싶어하는 것 모두 기본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의 귀결입니다.

오웬이는 왜 소피아랑 놀고 싶은 것일까요
저는 왜 이충희의 팀을 응원하면서도 이충희는 응원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왜 학교에서 테뉴어를 받고 싶어하는 걸까요

아, 참고로 소피아는 같은 반의 샤흘릇(Charlotte)이라는 여자 아이와 쌍둥이인데, 오웬이 말에 따르면 샤흘릇은 오웬이를 좋아해서 오웬이와 놀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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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

오늘 겨울학기 (미국에서는 봄학기라고 부르고 캐나다에서는 겨울학기라고 부릅니다) 개강입니다. 저는 가을학기에는 대학원 수업만 하나 하고 겨울에는 학부 과목을 세 개 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겨울학기에는 수업에 시간을 많이 쓰게 되지요. 수업이라는 걸 한지도 거의 10년이 되어가지만 학부 수업은 저에게 참 힘든 일입니다.

first day

넵! 바로 그 때가 왔습니다.

막상 겪어 보니

2년쯤 전부터 시작된 노안(presbyopia)이 이제 많이 진행되어서, 제 생활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장점부터 꼽아보자면, 밤에 침대에 누워서 쎌폰을 확인할 때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나 샤워하고 난 후에 안경을 쓰지 않아도 아주 가까운 곳을 이전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반면에 작은 글자로 된 글을 읽을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큰 불편함인데요, 그 중에서도 저널(학술지)을 책으로 읽지 못하는 것이 제 일상생활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입니다. 페이퍼를 읽는 일은 제 하루 일과의 큰 부분이기 때문에 이건 정말 큰 변화입니다. 이제 페이퍼(논문)는 화면을 확대해서 모니터로만 봅니다.

제가 페이퍼라는 것을 읽기 시작한 석사과정 1년차에도 (2003년) 대부분의 페이퍼는 PDF로 되어 있어서 종이로 된 책 대신 모니터에서 읽을 수 있었고, Google Scholar (페이퍼 검색 엔진, 2004)과 Dropbox(2007)을 사용하게 된 이후로는, 대부분의 동료들이 페이퍼를 모니터로 읽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도 늦게까지 – 최근까지 – hard copy journal을 읽었습니다만, 이제 저에게 모니터냐 종이냐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게 되었네요. 그래서 올해부터는 저널의 정기구독도 중단했습니다. 안그래도 coding이나 writing등으로 모니터 보는 시간이 많은데, 이제는 그나마 페이퍼 읽는 시간도 모니터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종이로 페이퍼를 읽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막상 “할 수 없이” 모니터로 읽다 보니 이것도 금방 적응이 되네요. LA에서 이 곳 몬트리올로 이사왔을 때 번거롭게 느껴졌던 아침마다 일기예보를 챙겨서 보는 것이나 겨울 아침에 차고 앞의 눈을 치우기 위해서 10분 더 일찍 일어나는 일도, 막상 해 보니 크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이외수의 소설 “들개”에서, 자신의 야성을 찾기 위해 산 속에서 씻지도 않고 살아가는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은 씻는 습관을 가졌고, 나는 씻지 않는 습관을 가졌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던 것처럼, 많은 일들이 실제로 겪어 보면 그것에 대해서 미리 우려하고 두려워하던 것보다는 훨씬 더 쉽게 일상으로 녹아드는 것 같습니다.

새 해에 있을지도 모를 변화들에 기대보다는 두려움을 갖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험심을 잃어가는 피할 수 없는 변화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두려움을 걷어내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올 한해가 되기로 다짐합니다.

실체와 이미지

제가 코스타 간사를 하는 동안 가졌던 개인적인 – 그러니까 신학이나 사역에 대한 고민과는 별개로 – 어려움 한 가지는, 비판과 지적을 많이 하는 제 실체와 이미지였습니다. 실체와 이미지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둘 사이에 교집합과 차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그 중에는 치기 어리다 싶을 만한 반항도 있었고 어쩌면 더 세게 싸웠어야 했을 부분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내부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가 겪었던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저를 “비판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 프레임에 가두어 놓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한 오해로 답답하기도 또 주눅이 들기도 했습니다.

두 가지 예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한 회의에서 제가 발표를 마치자 어떤 분이 저에게 “왜 그렇게 비판적으로만 이야기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비판적으로 들렸냐는 제 질문에, 그분은 저에게 뭐라고 딱히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은 없지만 전체적인 “뉘앙스”가 비판적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다시 제 슬라이드를 펼쳐 보았으나, 저는 제 발표에서 비판적인 내용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코스타와 오래 함께 일해 온 어느 단체의 간사 한 분이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셨습니다. 그 단체의 어느 간사와 코스타의 어느 간사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그 문제로 제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고 싶다는 메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갈등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때는 제가 이미 코스타 간사를 사임하고도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 메일을 보내신 분이 잘못된 상상을 하셨는지 아니면 잘못된 상상을 한 누군가로부터 보고를 받으셨는지는 제가 알 수 없으나, 정보가 만들어지고 전달되는 어느 한 시점에서 그 갈등으로 인해 화가 나 있는 제 모습이 각색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가수의 죽음과 그 아내의 석연치 않은 행동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제기되는 의혹에 대해서 그녀가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일지 모르지만,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과 “그런 짓을 한 사람”의 차이는 뚜렷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 발표에서 비판적인 내용을 쏟아낼 만한 사람이었고, 협력 단체와의 갈등 속에서 일선에 나와서 논쟁을 벌일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바로 이런 이유로 저는 당시에 그 오해들에 대응할 자신감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나는 이런 오해들을 받을만 하지” 라는 자책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가수의 아내도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녀가 실제로 얼마나 나쁜 행동들을 어디까지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실제로 한 일이 아닌 했을 법한 일들을 근거로 그녀를 비난하는 일은 옳지 않아 보입니다.

참고 벼르고 배우고

만나는 사람마다 갈등을 빚게 되는 날이 있지요. 컨퍼런스에서를 제외하면 하루에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드문 저로서는 그런 날이 거의 없는데요, 어제가 그런 날이었습니다. 서로간에 짜증 섞인 세 번의 대화/미팅을 하고 나서 – 세 명 모두 같은 직장 내의 교수였고 세 번의 대화 모두 서로 다른 주제였습니다 – 제 오피스에 돌아와 앉으니 퇴근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밀린 일들을 하나도 덜어내지 못하고 감정과 체력만 소모했다는 생각에 더 허탈하고 화도 나고 그랬습니다.

뭐가 문제였을까, 오늘 나는 어떤 배움을 얻어내야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그 세 사람이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저로 인한 짜증을 쏟아낼 내용을, 그러니까 소위 제 뒷담화를 상상해서 글로 써 봤습니다.

(그 내용은 당연히 이 블로그에서는 생략입니다. ^^)

그런데 제 기대와 달리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이 A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a라는 말과 행동을 했는데, 그것이 B라는 틀에 근거해서 b라는 행동을 한 나와 갈등을 빚었다는 잠정적 결론에 이르렀다고 해더라도, 저도 그의 A 가치관에 동의할 수 없었고, 그도 저에 대해서 “어떻게 B라고 생각할 수가 있나!”라며 흥분하는 모습만 떠올랐습니다.

제가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해결 능력이 부족하다는 건 자각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늘 해오던 대로 그저 피하기만 하는 것 외에, 뭔가 다른 훈련을 스스로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어제는 더욱 간절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배움은 있었습니다. 어제 만난 그 세 사람이 모두 저보다 직장 상사 (i.e. 부교수 이상)이고, 어제 갈등을 빚은 이슈들 역시 힘으로 맞서면 저만 피해를 보게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제가 나중에 조교수와의 대화에서 그들과 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다짐들을 조금 더 정리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짐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그러니까, 나는 나중에 잘해줘야지 따위의 다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 배워왔으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밴드 가을방학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어제 일은 흘려 보내렵니다.

똑똑한 아이길 바래 붙인 이름
똑똑하면 행복해지는 걸까, 지혜
인생의 절반은 참고 또 절반은 벼르고
왜 즐기질 못하니, 왜 놓지를 못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