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망함

부모님 연세에 비해서 늦게 태어난 저는, 친척 모임이나 부모님 친구분들 모임에 가면 또래 친구가 없었습니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에 외가댁 모임에 가면 제 이종사촌과 외사촌들은 모두 대학생 또는 그 이상이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참 지루했고 그래서 그 모임에 가기도 싫었더랬지요. 외할아버지/외할머니댁은 여의도의 어느 아파트였는데, 숫기 없는 어린 아이였던 저는 어른들께 인사만 드리고 그 집을 나와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서너시간씩 혼자 있다가 식사때가 되어서야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다들 저에게 “올해 몇살이냐, 많이 컸네”등의 겉도는 인사말만 걸어서 오히려 제 무료함과 어색함을 더하기만 하던 그 시간에, 그래도 따뜻하게 제게 장난도 치고 놀아주기도 하고 진심어린 말도 걸어주던 사촌으로 형이 한 명, 누나가 한 명 있었습니다. 둘 다 저보다 일곱여덟살이 많았기에 저를 데리고 놀아주는 데에 한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우두커니 있던 저에게는 그런 관심이 참 반갑고 고마워서 삼십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습니다.

그 이종사촌 누나가 오늘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갓 오십인 젊은 나이이고 그 부모님도 살아 계셔서 그 안타까움과 충격이 더 크네요. 산다는 것의 의미나 하루와 순간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게도 되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는 황망함에 다시 하얗게 지워집니다.

우리는 평가의 수단을 가지고 있는가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믿을 만한 소개로 찾아간 그 의사 선생님은, 의학을 잘 모르는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그림도 그려 주시고 비유도 적절히 사용하여 친절하게 제 증상을 설명해 주셨고, 이럴 경우 가능한 치료법들을 열거해 주셨으며, 그 중에서 자신이 권하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추천도 해 주셨습니다. 아무튼 저에게는 만족스러운 병원 방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병원과 의사 선생님에 대해서 만족하는 이 근거들은 적절한 것일까요?

물론 친절은 환자의 기분을 좋게 하고, 적절한 수단을 사용한 눈높이 맞춤 설명은 환자를 안심시킬 수 있겠지만, 사실 의사의 진단이 정확한지와 그가 제시하는 치료 방법이 적절한 것인지는 의학과 의료에 정통하지 못한 환자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 부분이 의사의 친절함과 언변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이 여러 webpage들과 입소문들을 통해서 소위 “의료 서비스”를 평가하는 데에 사용하는 기준은 친절함과 깔끔한 설명,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가 다 나았는가 등입니다. 이 중에서 마지막 부분은, 사실 그 의료진만이 원인인지 여부를 분명히 할 수 없을 만큼 confounding factors가 많음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의료 서비스를 평가할 제대로 된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도, 내가 가진 기준에만 근거해서 결론에 이르고 있으며, 더 심각하게는, 그러한 결론 도출과정의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경각심 마저 잃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료 분야 뿐만이겠습니까.

대부분의 대학에서 학생들은 학기말에 자신이 수강한 수업과 교수에 대한 평가를 합니다. 평가 항목들 중에서는 학생들이 판단할 수 있을 만한 항목들도 많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이 교수는 수업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진행했나요?” 같은 질문에 답을 할 때에, 학생들은 과연 그에 걸맞는 평가의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강의 평가 점수는, 한 학기동안 교수가 학생들에게 얼마나 진심으로 대했으며 친절했는가와 얼마나 깔끔하게 설명을 잘 했는가에 주로 근거합니다. (물론 성적을 얼만큼 잘 주느냐도요.)

정치도 그렇습니다. 정치인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인격적이고 진실한지 따위에 근거해서 총리,국회의원, 장관, 대통령을 평하는 유권자의 선택과 여론은 과연 적절한 평가 기준에 근거한 것일까요? 저에게는 이러한 기준들만으로 하는 평가들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말이지요.

적절하고 충분한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소비자와 유권자들은 판매자와 권력자를 평가할 권리와 때로는 책임을 지닙니다. 의학을 모른다고 해서 자신이 받는 의료 서비스에 대한 평가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며, 학생들의 강의 평가는 결국 단점보다 장점이 크게 작용하니까요. 다만, 적절한 평가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경우,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며 자신의 어설픈 판단을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평가의 기준이 충분하거나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각과 인식 정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요즘 한창 이슈들이 많은 한국과 미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자신감 넘치는 평론들이 피로감을 주는 이유는, 그 주장들의 강경함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각과 인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

한국 국회의원 김무성이 공항에서 자신의 carry-on luggage를 수행원에게 전달하면서, 그 수행원 쪽으로 시선을 향하지 않은 채 밀어서 전달한 모습이 “no look pass”라는 조롱과 풍자로 이야기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일이 화제가 된 이후에 김무성과 인터뷰하는 기자가 그 일에 대해서 묻자, 수행원이 보이길래 밀어줬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되묻는 모습이 알려지기도 했지요. 그의 이 인터뷰를 곱씹어 봅니다. 그러게요, 뭐가 잘못일까요?

제가 대학교때 잠깐 몸담았던 모임에서는 4학년이 1학년을 부를 때 무성음으로 “춧춧”이라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면 1학년은 벌떡 일어나서 “예”라고 대답하며 그 4학년에게 가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지요. 운동부들과 가까운 모임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여러 가지 규율이 많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어서 3학년 선배 한명에게 “그냥 야! 라고 부르시는 게 더 편하실 것 같은데, 꼭 그렇게 강아지 부르듯이 불러야 하나요?”라고 되물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하고 말대꾸한다며 혼만 났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저는 그 모임을 나왔는데, 1학년을 부르는 호칭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 호칭이 시사하는 여러 가지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이유가 컸습니다.

제가 박사과정때 교수와 그의 오피스에서 미팅을 하던 중에, 다른 교수 한 명이 잠깐 미팅을 하자며 그를 찾아왔습니다. 제 방에 돌아가서 언제가 될지 그 미팅의 재개를 기다리던 중, 그 교수에게 메일이 한 통 왔습니다. 제목도 없고 내용도 없는 blank mail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실수로 클릭했는지 교수에게 확인하려다가 말았는데, 30분쯤 후에 다시 메일이 왔습니다. You can come. 이라는 한 문장이었습니다. 다시 찾아간 교수 방에서 그는 저에게 아까 메일 보냈을 때 왜 오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Blank mail이어서 무시했다고 하자, 자기는 그 정도면 제가 알아들을 것으로 생각했다며 답답해 했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김무성만큼이나, 그 때 그 3학년 선배도, 제 지도교수도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러게요. 어떻게 생각하면 굴러오는 가방을 받는 일, “춧춧”이라는 호칭에 대답하는 것, 그리고 blank mail을 알아서 추측해서 그 방으로 달려가는 일 자체는 모욕감을 느끼는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수행원이 무릎을 꿇어야 했던 것도 아니고, 선배가 후배에게 욕을 한 것도 아니고, 그 교수가 저를 학대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사실 그 수행원은 평소에 무릎을 꿇어야 할 수도 있고, 그 모임의 선배들은 후배에게 쌍욕을 종종 했으며, 그 교수는 저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모욕적인 말을 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그 일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 장면이 시사하는 다른 장면들의 바탕색이 그리 밝게 상상되지 않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그 장면들이 수행원과 후배와 학생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는 항변은 일견 동의가 됩니다만, 그들에 대한 예의과 존중에서 그런 행동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를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더 높은 사람임을 표현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고 싶은 욕구는 우리 안에 깊게 내재하는 것 같습니다. 제 삶의 장면들 속에서 갑(甲)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 삶의 모습들을 돌아봐도, 제가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을(乙)로서의 기억들이 주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적어도 저는 제 삶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는 반성과 자람으로 귀결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만큼이나 두려운 길입니다.

 

Alpha and Omega

오웬이의 데이케어 마지막 날입니다. 그 동안 오웬이를 맡아 주셨던 선생님들 한분 한분을 따로 만나서 인사를 나눴습니다. “아이가 처음에 많이 울고 영어도 불어도 한 마디 못할 때 맡아 주셔서 특별히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에 오웬이의 데이케어 첫 선생님이셨던 분은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습니다. 삶의 궤적이 맞닿고 떨어지고 하는 무수한 반복 속에서도 그렇게 무뎌지지 않고 아쉬움을 표현해 주시는 그 분의 모습이 저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고마운 분들의 마음만큼 오웬이가 자라 주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의 사랑에 자식이 오롯이 반응하기를 기대하는 것 만큼이나 허황된 것일 테고요, 그저 머금은 사랑의 자양분으로 촉촉하게 자신만의 잎싸귀를 틔워내기를 응원합니다.

사진은 오웬이의 데이케어 첫 날과 마지막 날 등교 모습입니다.

Daycare first and last

자기 변호 본능을 거스르려는 노력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어서 참 좋겠다.” 중학교 2학년때 저의 가까운 친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왔지만, 그런 표현으로 들으니 다른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나만큼 말이나 글로 정리하지 못하는 걸까? (너무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 말을 들었던 열네살때까지는 그냥 제가 똑똑해서 말을 잘 한다고 착각했더랬습니다.) 나도 내 말과 글에 아쉬움과 답답함이 많은데, 그건 표현의 모자람보다는 생각의 불충분함일까? 지금보다 내 생각을 더 잘 표현하게 되면 나는 더 행복해질까?

삼십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가끔씩 되새기게 되는 고민의 시작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영주권과 관련해서 제 변호사와 있었던 일은 사람의 능력과 자기 방어 우선 본능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민을 저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법을 더 잘 알게 될 수록, 자기 스스로의 행동의 적법성/위법성 여부를 본능적으로 먼저 떠올려서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제 변호사는 미숙해서 그것을 저에게 방어적이고 명시적으로 표현했을 뿐, 누구나 마음 속으로는 그러한 자기 방어를 우선하는 것이 본능일 지도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생각할 시간이 없을 만큼 급작스러운 자동차 정면충돌 상황에서 운전하는 사람의 뒷자리에 앉은 승객이 가장 위험하다는 통계 역시, 운전하는 사람이 뒷사람과 자신의 안전을 비교해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충돌로부터 자신의 몸을 피하려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지요.

그동안 억울했다며 어용 지식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유시민을 보며, 저는 정말로 저렇게 살지 않도록 힘써야겠다는 반성과 다짐을 합니다. 노무현 정부가 진보 언론 때문에 실패했다는 그의 진단은 존중하고 되짚어 볼 가치가 있겠습니다. 저는 그 진단에 동의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독단적인 진단에 이은 그의 선동적이 발언과 행태는, 과연 말을 잘 한다는 것이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제 고민을 더 깊게 합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지난 두 주 동안 유시민의 썰전은 유치하고 피곤한 말들로 가득했습니다. 새 정부의 정책과 관련된 논의에 대해서 문재인으로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최선이다라는 주장으로 그는 일관했고, 문재인 개인의 성품에 대한 찬사까지 곁들여서 다양한 관점에서 시사적 이슈를 바라본다는 프로그램의 취지를 무색하게 했습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깊은 사색과 열린 토론을 뒤로 한 채 자기 변호와 방어에만 힘을 쏟는 모습이 얼마나 추잡할 수 있는지 처절하고 안타깝게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억울했으니 – 물론 그것도 자신의 일방적인 결론에 근거해서 – 이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사용해서 나와 내 편에 대한 변호와 방어를 우선하는 것을 나의 소명으로 삼겠다는 그의 다짐은 얼마나 비루한지요. 꼭 그렇게 다짐하지 않아도, 개인이 가진 능력은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에 우선적으로 사용되는데 말이지요.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다짐은, 내가 가진 재능과 위치가 사용되는 방향이 내 본능을 거슬러서 나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과 어깨를 잇대는 일이 되도록 스스로를 다잡는 절실함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