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배우는 사람

잘 배우는 사람들을 뽑는 회사들이 비교적으로 잘 성장하는 반면에, 잘 배우는 사람들을 찾는 리더가 있는 회사는 주로 망합니다.

왜일까요? 그건 아마도 “잘 배운다”는 말이 갖는 다면적 함축 때문일 것입니다. 회사를 성장시키는 배움은 열정의 ramification(이 단어, 파급효과쯤으로 해석하면 될까요?)이겠고, 잘 배우려는 사람을 찾는 리더는 사실 자기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찾는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잘 배우려는 노력으로 자신의 열정을 치환하거나, 잘 배우는 사람들을 찾는 우두머리들이 자신의 편협함을 미화시켜서 스스로를 속이는 모습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은 아쉬운 모습입니다. 특별히 후자의 경우가 변화되는 모습은 더욱이 드문 일이겠지요.

연구를 함께 할 대학원생을 어떻게 찾고 뽑을 것인지는 교수들 사이에서 끊이지 않는 대화의 주제입니다. 대체로 주어지는 대척점은 말 잘 듣는 학생과 열정이나 아이디어가 많은 학생 사이의 고민입니다. 교수들마다 자기 선호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모아지는 결론은, 단순히 실험을 진행하거나 데이터를 정리하는 작업을 할 학부생이나 석사과정 학생은 시키는 대로 일하는 학생이 좋고, 공동연구를 하거나 자기 제자가 될 박사과정으로는 자기만의 연구열정이 있는 학생이 좋다는 것입니다.

돌려서 보면, 공동연구를 할 재목으로 여기는 학생을 찾을 때는 그의 아이디어와 열정에 주목할 것이고, 내 일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다면 잘 배우는 학생이 적임자이겠지요.

한번 더 돌려서 보면, 함께 일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려는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그리고 저 사람이 나에게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앞날을 보여주는 마법의 구슬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 알았더라면 싶은 것들 중 하나입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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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랜만에 미국에 가서, 미국 사람들 그리고 미국에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도 하고 스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아닌 호주나 유럽 사람들과 미팅을 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아, 미국이 이랬었지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요, 그 중 한 가지는 미국 사람들의 표현이 크다는 것입니다. 호텔 체크인할 때부터 “Hi”라는 말도, 캐나다 사람들에 비해서 억양의 높낮이가 크고 목소리도 더 큽니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과 날씨 등을 묻는 small talk도 더 많이 합니다. 미팅에서 처음 만난 교수들도 “It’s VERY nice to meet you!”라며 반갑게 인사합니다.

생각해 보니 캐나다에 처음 왔을 때, 상점이나 식당 직원들이 불친절하다고 느꼈는데 아마도 이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캐나다에서는 Hi나 Thank you도 무미건조하게 작은 소리와 낮은 톤으로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미국 사람들은 마치 진짜 고맙고 반가운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미국에서 살 때에는 못느꼈는데, 이번 컨퍼런스 기간 중에 이런 인사들이 어색해서 저 혼자 피식 웃기도 했습니다. 호주나 유럽 학교 사람들과도 미팅이 있었는데, 그들은 미국 학교 사람들보다 훨씬 더 차분하고 조용하며 덜 반갑게 인사합니다. ㅎㅎ

아래 동영상에 의하면 유럽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 사람들에 대한 가장 큰 이미지는 loud하다 (시끄럽다)는 것이랍니다. 그 밖에 superficial(피상적이고), nice(친절하고), enthusiastic(열정적이고) 등의 의견이 있습니다. 미국과 가까운 캐나다와 비교해도 그렇습니다. Loud하다는 것이 꼭 나쁜 뜻은 아니고, 그만큼 표현이 크고 때로는 과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화에서 캐나다 사람들보다 목소리가 큰 것 같기도 합니다. 특별히 반가울 상황이 아닌데 엄청 반가워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다시 캐나다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아침 늘 이용하는 학교 앞 스타벅스에서 웃음끼 하나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제 주문을 받는 직원의 얼굴이 반쯤은 어색하고 또 반쯤은 반갑고 그랬습니다. 지난 일주일동안 시카고에서 매일 아침 가던 스타벅스 직원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미국에서 8년을 살았고 캐나다에서 10년째 살고 있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 편하지도 않고 또 불편하지도 않습니다.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싶은 오늘입니다.

시카고

학회로 다운타운 시카고에 와 있습니다. 시카고 공항은 이런저런 일로 많이 다녔는데, 다운타운 시카고에 온 것은 이번에 세번째입니다. 오랜만에 오는 미국과 시카고 둘 다 반갑네요. 몬트리올로 처음 이사했을 때에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미국이 더 이국적으로 느껴지고, 그만큼 그리워집니다. 고층에 위치한 제 호텔방에서 보는 skyline도 좋고,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에서 반겨주는 흑인들 특유의 말투와 유머도 신선합니다. (몬트리올에 사는 흑인들은 대부분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로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불어를 합니다.)

어제 Chicago Cubs 경기가 있어서인지, Cubs 옷을 입은 사람들이 길에 많습니다. 모두 백인들입니다. 어제까지 Cubs와 경기했던 Oakland Athletics가 계속 시카고에 머물면서 내일부터는 Chicago White Sox와 게임을 합니다. 주말에는 White Sox 게임을 하나 (야구장에 못가면 호텔방에서라도) 보고 싶습니다.

제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저희 학회가 오늘 시작하는데 같은 장소에서 어제까지 다른 학회가 있어서, 어제 하루는 두 학회 사람들이 겹치는 날이었습니다. 저희 학회도 엄청 큰 학회이고 제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데도, 학회 뱃지 없이도 인상과 복장만으로 저희 학회 사람과 다른 학회 사람이 이상하게 잘 구분됩니다. White Sox fans와 Cubs fans만큼은 아니지만요. 자신의 직업이나 분야가 외모나 인상과 연동되는 일은 참 신기한 일입니다. 호텔에 있는 전신거울 앞에서 제 모습에도 제 직업이 숨어 있나 잠깐 찾아봤습니다. ㅎ

적(敵) – 둘

제가 일하고 있는 학과/학교는 파벌과 암투, 음모와 세력다툼이 심한 곳입니다.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지만, 어떤 사안에 대한 표결을 앞두고는 조교수들 방에는 손님 방문이 잦아집니다. 씨니어 교수들이 조교수들에게 자기 편에 서라고 회유와 협박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협박의 형태는 때로 매우 정밀하고 교묘하게 고안되어서, 자기들이 직접 협박을 하지 않고 여기저기에 뒷이야기를 하고 다니면서 여론으로 압박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제가 아쉬워하는 부분은, 조교수들이 종종 너무 쉽게 그 사안의 중심으로 뛰어들어서 남의 싸움을 대신 싸우는 일을 자처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A와 B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는 물음 앞에서, 왜 이 상황이 A 아니면 B여야 하는지, 지금 왜 그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이 상황을 A와 B로 구분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번 더 묻는 대신에, 학교 내의 정치꾼들이 던진 프레임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내가 A를 택해야 할까, 아니면 B를 지지해야 할까”를 두고 고민한 후에,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싸움판에 휘말리는 것이지요. 주어진 질문에 답하기보다는 질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학자의 직업임을 떠올리니, 이런 행동이 아쉬울 뿐 아니라 모순적으로까지 보입니다.

때로는 그 사안과 아무 상관 없는 조교수 두 명이, 어떤 사안과 관련해 다른 줄을 섰다는 이유로 사이가 서먹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그 사람이나 저 같은 조교수들의 싸움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남의 싸움입니다. 살면서 제가 싸워야 할 중요한 일들을 대하기에도 제 힘이 모자란데, 남의 싸움을 대신 싸워 주면서 제 싸움인 것처럼 착각하지는 않고 싶습니다.

적(敵) – 하나

제가 미국에 살면서 memorial day에 뉴스를 볼 때, 한국의 현충일에 보던 뉴스와 다른 점 한 가지를 느꼈더랬습니다. 한국 현충일에는 “나라를 지키다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는 반면, 미국 memorial day에는 “자유와 평화를 지키다 돌아가신” 분들을 기린다는 것입니다. 궁금해서 냉전 시대 뉴스도 찾아 봤지만 소련이나 중공, 혹은 베트남이나 북한, 더 나아가서는 공산주의와 싸웠다는 표현은 없었고, 1980년대에도 미국은 전사한 군인들을 자유와 평화의 세상을 위해서 싸운 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미국 군대가 한 일이 반드시 세계 평화를 위한 것도 아니었고, 한국 군대가 한 일이 단순히 한국만을 지키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상반된 표현은 적어도 그 지향점과 동기부여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주적(主敵)으로서 북한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 군대의 기강은 어찌 되겠는가”라고 묻는 어느 한국 정치인의 말은, 그가 우리의 싸움을 특정 가치를 지향하는 싸움보다는 우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자가 옳고 그름의 싸움이라면 후자는 우리 편과 너네 편의 싸움입니다. 그렇기에 한국은 다른 곳으로 자국의 군대를 파병할 때에도 국제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해당 국가를 도와 주러 간다고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현실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싸움이 가치를 향한 움직임이라면 우리는 그 정당성과 동력은 물론 우군(友軍)도 더 크게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일본의 아베 정부가 하는 일들이 한국을 도발해서 기분이 나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지향하는 인류 보편의 공공선과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기에 분기탱천하는 것인지 사이의 차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라 생각합니다. 후자가 더 큰 물결을 일으키지만, 기득권 지배계급으로서는 자신들의 기득권 옹호를 위해서 전자가 훨씬 더 좋은 수단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좀더 진중하게 이 “기회”를 살리려 하고, 다른 이들은 천박하게도 애국과 이적의 구분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탐욕을 숨기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이 다 그러하겠으나 특별히 화를 낼 때에는 내가 무엇을 위해서 분노하는가를 한번쯤은 되돌아보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