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Owen!

오웬이는 시즌 (9월-4월) 동안 일주일에 세 번 하키를 합니다. 게임이나 연습을 따라가서 다른 부모들은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응원도 하고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하지만, 저는 주로 랩탑이나 페이퍼를 들고 가서 일을 합니다. 일주일에 세 번이나 그 시간을 일을 안하면서 보내기에는 제 일정이 허락이 안되네요. 그래서 오웬이가 득점이나 어시스트를 해서 저한테 자랑이라도 하려고 “아빠, 봤어?”라고 물을 때 선뜻 답하지 못할 때면 오웬이에게 미안해집니다.

지난 주에는 오웬이네 팀이 오타와에서 열린 토너먼트에 참가해서 2박3일 일정으로 가족이 함께 다녀왔습니다. 조금 특별한 대회이기도 하고, 저희 가족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 가족도 모두 함께 앉아서 응원하기로 해서, 저도 이번만큼은 오웬이 경기들을 모두 집중해서 보고 큰 소리로 응원도 했습니다.

야구 외의 다른 스포츠에 큰 재미를 못느끼고 살아왔는데, 캐나다 퀘벡 출신 오웬이 덕분에 하키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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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저와는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제가 박사과정을 졸업할 때 그 프로그램에 입학했던 중국 출신의 한 여학생이 졸업하고 교수가 되어서 재미있는 연구들을 많이 잘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얼마 전에 출산을 하던 중에 childbirth complication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제 박사과정 지도교수로부터 들었습니다.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답니다. 그녀가 박사과정을 마치고 일년쯤 지나서 일어난 일이었네요.

제가 박사과정 1년차때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페이퍼들 중 하나의 저자가 또한 지난 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박사과정때 한창 연구를 활발히 하던 조교수여서 저도 그 사람처럼 재미있는 연구를 많이 하고 싶다는 꿈을 저에게 주기도 했었는데, 52세의 젊은 나이임에도 오래 투병해온 암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100세가 넘은 노인의 죽음이라고 해서 자연스러울 수는 당연히 없겠으나, 제 나이또래 사람들의 죽음은 특별한 충격과 자각, 그리고 상실감을 줍니다. “만약에…”로 시작해서 이입해보는 감정은 겉잡을 수 없는 두려움과 무력감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당부하신 마가복음 6장을 읽습니다. 혹시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마지막처럼 우선순위를 잃지 않기를, 그리고 오늘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사랑하기 위함임을 되새깁니다.

자랑

오랜 노력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을 때, 인기 있는 사람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는 순간, 나중에 꼭 기억하고 싶을만큼 특별한 장소에 다녀왔을 때, 제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때… 이 순간과 기분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기도 합니다. 다르게 이름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나눔을 자랑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습니다.

자랑을 왜 하는 걸까요?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우월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부자도 아니고 부자인 척 할 마음도 전혀 없는 사람이 오랫동안 아껴 모은 돈으로 제법 비싼 멋드러진 휴양지에 다녀온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그 곳에 갈 비용은 꿈도 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박탈감과 좌절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대체로 스스로도 그 순간이 신기하고 감격스럽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의 승진, 자식의 명문대 합격, 누군가로부터 받은 감사 편지 또한 그렇지요.

특정 이야기의 소재가 꼭 자랑으로 귀결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마음이 힘든 사람을 위로한 이야기나 집에 온 손님을 정성스럽게 대접한 후기는 이야기 전체의 주인공으로 누가 드러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분위기의 글이 됩니다. 겸손한 반성처럼 보이는 자랑도 있고, 어떤 대회에서 1등한 이야기를 적었는데도 글쓴이를 부러워하는 마음도 일으키지 않은 채 깊은 배움과 따뜻한 감동만 남겨주는 글도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참 무섭습니다. 제가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든지, 제 인격은 어떻게든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이미 잘 알려진 연구결과와 우리의 경험에서처럼,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의 사용은 우리의 우울함(depression)을 유발합니다. 다른 사람의 큐레이트된 삶의 단편이 나의 현실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지요. 열등감과 우울함은 아래를 향하는 나선계단 같아서, 이렇게 현실을 비교하면서 생기는 우울함은 열등감을 낳고, 열등감을 입고 현실을 대하면 나의 삶을 더욱 비교의 대상으로 놓게 되어 우울함이 깊어집니다.

소셜미디어가 없던 시절을 떠올려 보니, 요즘 사람들이 자랑하는 일을 좀 더 많이 할 뿐 아니라 망설임 없이 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자랑하고 싶어도 왠지 멋적기도 하고 유난 떤다는 반응이 두렵기도 해서 망설이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는데, 요즘 온라인의 글들 (제 블로그도 물론 포함입니다)을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자랑질이 봇물을 이룹니다.

자랑이 나쁜 것일까요? 어떤 하나의 행동범주를 좋거나 나쁜 것으로 평하는 일은 섣부른 것이겠죠. 다만 저는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으로 스스로를 경계하려고 합니다. 이 거울에 저를 비추면, 제가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받을 박탈감이나 제가 도움이랍시고 간섭한 말과 행동의 불완전함이 만들어내는 공간들이 더 무거워집니다.

오스 기니스는 우리 삶을 달리기 경기라고 할 때 그 경기의 유일한 관중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자랑을 삼가려는 인내와 다른 사람의 자랑에 우울해지지 않으려는 안간힘 양면에서 저에게 큰 응원이 되는 말입니다.

기쁨보다는 소망

몬트리올의 겨울이 힘든 것은 추위보다는 어두움입니다. 대부분의 날에 눈이 오기 때문에 늘 어둡고, 어쩌다가 맑은 날에도 오후 3시쯤이면 노을이 지기 때문에 제 의지와 상관 없이 하루를 마감하라고 재촉받는 기분입니다.

지난 주에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를 지난 이후로는, 낮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봤자 일주일동안 낮의 길이가 2분 정도 늘었으니, 긴 어두움의 겨울은 이제 시작일 뿐이지요. 낮의 길이를 느끼지는 못해도 어제보다 오늘 낮이 조금 더 길다는 생각은 저에게 활력을, 오늘보다 내일 낮이 더 길 것이라는 기대는 희망을 줍니다.

한 해 중에서 낮이 가장 짧은 날이 낮에 대한 희망의 정점이 되다니, 자연스럽고도 역설적입니다. 한 해를 1% 남겨 놓은 지금의 상실감과 절망도 동지(冬至)밤처럼 소망의 단초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기쁨보다는 소망으로 사는 것이니까요.

소통의 채널

제가 사는 지역의 대부분의 TV 채널은 불어로 나오지만, (당연한 이유로) 저희 집은 영어로 방송하는 몇 안되는 채널을 시청합니다. 오웬이가 아기였을 때부터 제가 읽어준 책은 한국어와 영어 뿐이었고, 함께 Netflix를 시청하거나 영화관에 가서도 영어로 된 영화만 봤으며, 교회에서도 영어만 사용하고, 오웬이와 함께 어울리는 가정도 모두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제 학교에 가는 길에 오웬이에게 불어로 하는 만화영화를 다 알아듣는지 물었더니, 오웬이 말이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영어보다는 더 많이 알아듣는다고 답했습니다.

오웬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저희 학교로 걸어서 출근하면서 생각해 보니, 요즘 저녁에 제가 오웬이를 데리러 학교에 갔을 때 친구들과 불어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작년에만 해도 불어는 수업 시간에만 쓰고 친구들과는 영어로 이야기했었는데 말이죠.

하기야 오웬이는 이 곳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있으니 불어가 제1언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그래도 제가 잘 알아 듣지도 못하는 언어를 제 아이가 가장 편한 언어로 굳혀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펐습니다.

예전에 이 곳 한인교회에서 청소년부를 담당하던 목사님과 대화중에, 이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곳의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과 소통이 어려운 이유로 자신이 불어를 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지만, 이 목사님이 볼 때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언어때문은 아닌 것 같다고.

오웬이와 말이 점점 통하지 않게 되더라도, 말보다 더 소중하고 단단한 소통의 채널을 서로의 마음 속에 꾸준히 다져 나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