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teris paribus

사회과학 연구의 많은 분야에서는, 어떤 사건의 영향력 또는 효과를 정확히 측정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 상황에서 실험을 하기가 어려운 데다가, 여러 가지 조건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하고, 측정 모델의 전제인 변수들의 독립성(independence)이나 외생성(exogeneity)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문제들을 완화하려는 노력은 사회과학 방법론의 중심축으로서 지금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분야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회사가 한 제품의 가격을 내릴 때 그 판매량이 얼만큼 늘어나는가를 측정한다고 해 봅시다. 경영/경제학의 경우 학부과정 통계 수업에서라면, 회귀분석(regression) 같은 간단한 통계모델을 통해 가격과 판매량 사이의 관계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부 4학년이나 대학원 과정에서 이 방법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선, 우리와 경쟁관계의 회사들이 서로 상대방의 움직임에 근거해서 자신의 가격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거시경제 시장이나 기후 변화도 소비자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게다가 우리 회사의 가격 결정은 회사 내부의 다른 결정들 (광고, 노동자 임금, 설비 투자 등등)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가격 자체만의 효과를 분리해 내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 정보들을 다 구해서 모델에 넣는다고 해서 정확한 측정 결과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가격과 매출 이 둘 사이의 관계만 놓고 보면, 대부분의 실제 데이터에서 둘 사이는 양의 상관 관계 (positive correlation)를 보입니다. 가격이 높을 수록 판매량이 높다는 것인데요, 이는 기업이 이미 판매량을 예상하고 난 후에 판매량이 높을 것 같은 제품의 가격을 높게 책정하기 때문입니다. 가격이라는 변수가 외생적(exogeneous)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통계 기법으로 해결한 후에 모델을 측정하면, 가격과 판매량 사이의 음의 관계 (negative correlation)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론이 정반대로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ceteris paribus, 즉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측정의 기본 전제를 성립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회과학에서는,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설명할 때에는, 어느 하나의 사건이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한국의 1970년대 경제발전이 과연 대통령의 개발정책으로 인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 명확한 답을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많은 상황에서 상황들을 단순화해서 비교하고 또 평가합니다. 한국의 교회들에 앉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의 1990년대에 목회와 기독학생 사역을 했던 사람들이, 지금의 사역자들에게 너희들이 우리때처럼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때만큼 되지 않는 거다, 우리 때에 그렇게 했더니 잘 됐었다, 너희들이 내 말 안듣고 변화랍시고 이렇게 했더니 결과가 안좋지 않느냐 등등의 지적은, 자신들이 일하던 시대의 부흥이 “다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고백과 직접 모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회과학적으로 경험적인 타당성을 갖추지 못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효과에 대한 평가를 다 무시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다음 두 가지의 경우의 평가에서는 ceteris paribus에 대한 기준을 높여서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 비교가 자기 자랑으로 사용되는 경우이고, 둘째는 그 평가를 다른 사람에 대한 지적과 비난으로 귀결시키는 경우입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대한 찬양이 단순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면,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기독교 사역의 예는 거기에 폭력이 더해진 경우입니다. 칠포세대(七抛世代)의 요즘 젊은이들에게, 내가 이렇게 해서 결혼했다든지 어떻게 열심히 공부해서 취업했다든지 하는 꼰대질 역시 무지와 악함의 결합입니다.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가격과 매출의 상관관계처럼, 전체 그림을 다 맞추고 나서 보면 그 결론이 정반대일 수도 있음을, 사회 현상을 이야기할 때에는 꼭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힘 내세요

지난 여름에, 임신중이던 제 아내가 약간의 유산 증상을 보여서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큰 걱정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던 아버지에게 제가 “걱정하지 마세요, 별 일 아닐 거에요”라고 말했다가 “네가 뭘 아냐”는 핀잔만 들었습니다. 맞는 말씀이었지요. 그 상황에 대한 남다른 이해도 없고 그 상황을 해결할 능력도 없는 제가 아버지를 안심시킨답시고 드린 말씀은 무책임하고 공허한 소음이었을 테니까요. 더구나 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이신데 말이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힘 내세요라는 말은 큰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말을 들을 때에 그나마 남아 있던 기운이 다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말은 누가 어떤 상황에서 건넬 수 있는 걸까요? 만약 제가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난 채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면, 다음 두 사람의 말은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자동차 정비를 조금 아는데요, 이 경우는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선은 가시는 곳까지 제가 데려다 드릴께요.”

이렇듯 제가 처한 문제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거나, 저를 도울 의지가 있는 사람의 “Don’t worry”는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힘내라고 소리치며 그냥 지나가거나, 자동차도 모르고 길도 모르는 사람이 저에게 “다 잘 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거나 오히려 짜증을 일으킬 수도 있겠습니다.

반대로, 그런 말을 해 주기로 기대되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는, 그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화가 나기도 합니다. 제 영주권 관련 서류가 모르는 주소로 배달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민국의 실수였습니다. 그 때 제 변호사 사무실에서 저에게 취한 태도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자기들은 결코 주소를 실수로 기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강조하면서, 혹시 제가 이민국에 그 잘못된 주소를 알려준 것이 아니냐는 추궁을 반복했습니다. 그 상황은 명백한 이민국의 실수였고 저 역시 제 변호사를 탓할 마음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기분을 상하게 하는 변호사 사무실과의 전화를 끊고 난 후에, 그들의 어떤 말을 들었다면 제 기분이 좋았을까를 자문해 보니 “Don’t worry. We’ll take care of it.”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태도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이민국에 연락을 또 해야 하는 그 상황이 변호사 사무실로서는 짜증이 날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상황에 대처할 지식과 기술이 저보다 많을 테고 결국은 그런 상황에 대한 책임을 나서서 지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힘 내세요.

제가 이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상황에서 상대방에 대한 공감 없이 무의미하게 이 말들을 내뱉지 않도록, 그리고 제가 이 말을 할 수 있는 – 그리고 해야 하는 – 상황을 놓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과 어깨를 잇대도록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연중 야구팬, 가을 야구팬, 그리고 비야구팬

저는 야구팬입니다. 미국 유학중에는 game을 많이 보기도 하고, 선수들의 기록을 머리에 담아두거나 트레이드 소식들에 관심을 기울였더랬습니다. 야구팀이 없는 몬트리올에 온 이후로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은 들이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야구팬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시즌기간 뿐 아니라 비시즌 기간에도 야구 이야기들을 follow하고 있습니다.

그런 야구팬으로서 “가을에만 야구 보는 사람들”에 대한 제 마음은 복잡합니다. 그 분들 덕분에 야구 열기가 더해지니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우선이지만, 가을 야구에 한정된 지식에 근거한 그들의 야구 평론들이 귀에 거슬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포스트 시즌에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선수에게 “저런 선수가 왜 선발투수냐”며 감독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분들 중에는, 바로 그 선수 덕분에 그 팀이 지금 포스트 시즌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연중 야구팬들은 가을 야구팬들의 열정을 환영하고 감사해야 하겠고,
가을에만 야구보는 분들은 연중 야구팬들의 식견을 존중하고 가을 야구의 한정성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한 겹을 더해서, 야구를 보지 않는 분들에 대한 존중 역시 중요합니다. 제가 야구를 좋아할 자유가 있듯이, 야구팬이 아닌 분들이 야구에 관심을 갖지 않는 선택 역시 존중되어야 하니까요. 물론, 비야구팬들께서도 야구팬들의 열정을 존중해야 하겠지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이 사람들의 생각과 관심을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중간지대에 놓고,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고, 때로는 내가 공개하고 싶지 않은 영역이 타인의 평가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다음 세 가지의, 특별히 세 번째의,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제 스스로의 매무새를 점검해 봅니다.

“야구 따위를 뭐하러 보냐”는 비야구팬.
“왜 야구를 안보냐”는 연중 야구팬.
“어떻게 요즘같은 때에 야구를 안볼 수 있냐”는 가을야구팬.

매일 소식들이 넘쳐나는 한국 정치에 관한 사람들의 말과 글에 스스로를 비춰 본 생각입니다.